▲ '퍼시픽 림'(2013)

평균 신장 80m, 어지간한 건물 25층 규모의 크기. 독일어로 사냥꾼이라는 의미의 거대 로봇 예거(Jaeger)들이 지구를 구한다는 설정의 영화 '퍼시픽 림'이 개봉했다. 거대 로봇에 대한 소년기의 꿈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탓일까? '퍼시픽 림' 영화 제작 중의 소식만 들어도 가슴이 콩당거렸었는데, 극장으로 달려갈 생각에 잠을 설칠 지경이다.

인간의 꿈을 가장 현실인 것처럼 꾸며서 보여주는 도구, 영화. 영화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할 정도로 영화는 다양한 꿈을 다루게 된다. 영화 속에는 언제나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환상과 상상력이 실제처럼 표현되는데, 재미난 것은 영화를 만드는 많은 사람들이 그 수많은 몽상들 중에서 귀신이나 사후 세계, 초능력자, 외계인들보다 더 비현실적인 대상으로 치는 것이 로봇 특히, 거대한 로봇의 이야기이다.

왠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귀신이나 외계인, 사람 크기의 로봇들이야 사람이 거죽 뒤집어쓰고 휘휘거리면 비슷하게나마 나오는데, 산만한 크기의 거대 로봇은 그것을 표현하고 묘사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돈이 많이 든다는, 대단히 현실적인 의미이다. 물론, 컴퓨터그래픽이 등장하면서 그 상황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컴퓨터그래픽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로봇이 쿵쿵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은 실제 그 로봇을 만드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 엄살을 떨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 지금은 이미 유명해질대로 유명해져 버린 거대 로봇 소재 영화 '트랜스포머'가 영화로, 애니메이션도 아닌 실제 배우가 등장하는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해도 우리나라 극장가, 배급업자들과 기자들은 그게 될까,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흥행이 될 리가 없어라는 식의 우려가 팽배했었다.

말 그대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설정. 1970년대 일본에서 시작된 작은 만화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식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했던, 같은 제목의 원작. 우주에서 온 메탈 생명체가 거대한 로봇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 인간과 대화를 나누며 지구 상의 자동차들로 변신을 해 숨어 있다가 악당들로부터 지구를 구해준

▲ '트랜스포머'(2007)

다는 이야기. 사실감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내용. 그나마 미국과 일본에서는 원작에 관한 향수라도 있다는데 그것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 기획 단계의 일이긴 했지만 일부 국내 흥행업자들은 제 아무리 마이클 베이 감독의 손을 거친다해도 이 작품은 비디오나 어린이 전용 케이블 TV로 곧장 넘어갈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그러나, 이게 왠일인가. 뚜껑을 열어 본 결과 '트랜스포머'의 결과는 상상 이상의 대성공이었다. 2007년, 744만명의 관객 수로 대한민국 역대 영화 흥행 10위권의 대기록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이후 속속 등장한 초특급 흥행 영화들로 10위권 후반까지 밀려나긴 했지만 2탄 격인 '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2009년)'이 750만명, 3탄 '트랜스포머 3 (2011년)'이 778만명의 기록을 세우며 시리즈 통산 2272만명의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거기에 2014년 개봉 예정인 '트랜스포머 4'가 제작 중에 있으니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거대 로봇 영화는 한국 영화 흥행 사상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거대 로봇을 소재로 한 영화는 '트랜스포머' 이전에도 적지 않게 시도되었었다. 사람이 특수 제작된 옷을 입고 로봇인양 끄덕거리며 연기하는 작은 로봇 이야기가 아니라 거대함을 묘사하기 위해 미니어쳐 셋트를 만들고 수많은 합성 작업이 필요했지만 사람들의 상상력은 거대 로봇 콘텐츠에 대한 끝없는 수요를 불러 일으켰고 적지 않은 시도가 있었다.

인간의 몇곱절, 몇십골절 큰 로봇이 처음 영화에 등장한 것은 1960년 일본에서였다. 엄밀히 이야기한다면 영화가 아닌 텔레비전 드라마. 1955년 처음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인기 만화 '철인28호'를 실제 배우들이 등장하는 실사판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 보면 참으로 조악하기 짝이 없으며 그 크기도 들쑥날쑥해 거대 로봇이라고 하기에 많은 무리가 있어 보였지만, 이 실사판 '철인28호'는 거대 로봇이 등장한 최초의 영상 콘텐츠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본격적으로 극장 상영용 영화에 최초로 등장한 거대 로봇은 1967년의 일본 영화 '킹콩의 대역습'에 등장한 메카니콩(MechaniKong)이라는 이름의 로봇 킹콩이다. 당시 일본에는 고지라라는 거대 괴수가 등장하는 씨리즈 영화가 큰 흥행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1954년 개봉해 당시 900만명이라는 전무후무한 흥행 기록을 세운 고지라의 두번째 시리즈 '고지라 대 킹콩'의 유사 연작의 하나로 기획된 작품이 바로 '킹콩의 대역습'이었다. 영화 속에는 킹콩과 괴수 공룡이 등장하고 그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기 위한 과학 병기로 등장한 것이 바로 로봇 킹콩, 메카니콩이었다. 이름하여 전자 괴수 메카니콩. 저작권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 일본에

▲ '로봇 족스' (1991)

서 유난히 흥행에 성공했던 킹콩을 자신들의 괴수 영화 씨리즈에 등장시키고 그 연작을 만들면서 이번에는 로봇 킹콩까지 등장시켰던 것이다.

이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비슷한 시도가 있긴 했지만, 나름 형식을 갖추고 거대한 로봇이 등장한 영화는 1991년의 미국 영화 '로봇 족스(Robot Jox)'였다. 세계 3차 대전으로 전쟁에 지친 인간들이 직접 싸우는 대 신 거대 로봇을 내세워 시합을 벌이고 승자가 땅을 뺏는다는 설정인데, 당시의 수준으로 봐도 보기 민망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이보다 1년 앞 서 '크래쉬 앤드 번(Crash and Burn)'이라는 거대 로봇 소재의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로봇 족스'의 제작 정보를 빼낸 소규모 영화사의 비디오 전용 영화로 최악의 평가를 들어야만 했던 작품이다.

거대 로봇 영화 '퍼시픽 림'에 등장하는 악당 괴물의 이름은 카이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괴수(怪獸)의 일본어식 발음이다. 영화의 내용과 큰 관련 없이 단순한 작명에 지나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거대 로봇 영화의 계보를 따져 보며, 그 기원이 일본 내 괴수 영화의 흥행으로 기인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 명명이 나름 관련된 문화와 콘텐츠에 대한 오마쥬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 김혁 ∙ 테마파크 기획자, 테마파크파라다이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