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봇의 '성'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들이 기대하는 로봇의 역할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만일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도와주고 상처난 곳을 돌봐주는 로봇이 있다면 이 로봇은 어떤 생김새를 하는 게 좋을까? 덩치 크고 큰 목소리를 갖고 있는 금속성 헐크 로봇이 좋을까. 아니면 부드러운 목소리를 갖고 있으며 아이 돌보미를 닮은 여성 안드로이드 로봇이 좋을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후자를 선호할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는 로봇이라고 하면 우리는 여성의 모습을 한 로봇을 떠올리기 쉽다. 엔지니어들도 여성스러운 머리결과 목소리를 갖고 있는 여성 로봇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로봇의 성 정체성은 사람의 생각과 관념, 그리고 편견까지 반영한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는 로봇에 '성(gender)'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들의 관습과 편견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들을 소개하고 있다. 심지어 기계나 작업 도구에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여성적인 이름을 붙일 것인가 아니면 남성적인 이름을 붙일 것인가에 따라 사람들이 받는 심리적인 영향은 다를수 있다.

실제로 기계에 ‘성’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문제가 생긴 사례도 있다. 지난 1990년대 BMW는 자동차에 설치한 내비게이션시스템에 대한 고객 불만 때문에 리콜한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 남성 운전자들은 여성으로부터 내비게이션의 방향을 지시받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지금이야 내비게이션에 여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지만 유럽에선 처음에 꼭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로봇에 ‘성’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는 노동 현장의 기존 관념을 강화할 위험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 빌레빌트대학 연구진은 로봇에게 성이 부여됐을 때 사람들이 로봇에 대해 갖는 태도에 관해 연구하고 연구성과를 ‘응용사회심리학회 저널‘에 소개했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2개의 로봇을 보여주었다. 하나의 로봇은 긴 머리와 통통한 입술을 갖고 있으며 다른 로봇은 짧은 머리와 도톰하지 않은 입술을 갖고 있었다. 두 로봇은 헤어스타일과 입술 모양 외에는 전부 똑같았다. 실험 참가자들은 이런 두가지 형태의 로봇을 보고 각각 ’여성‘ 로봇과 ’남성‘이라는 성 정체성을 부여했다. 한발 더 나아가 남성 로봇은 기계를 수리하고 집을 지키는 업무에 적당한 것으로, 여성 로봇은 가사 일이나 아이 돌보미 등에 적합한 것으로 인식됐다.

이런 경향은 로봇 분야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영국 사우스햄프턴대학 ‘웬디 홀’ 교수는 과학을 ‘순수하고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컴퓨터 ‘알고리즘‘ 조차 인간적인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구글의 알고리즘에 이 같은 연구를 적용했다. 예를 들어 카네기멜론대학과 ’국제컴퓨터사이언스연구소‘ 연구자들이 조사한 결과 남성 구직자는 여성 구직자보다 검색 엔진에서 보다 많은 연봉을 받는 임원급 일자리 광고를 접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차세대 기계시대(next machine age)'의 도래와 노동시장의 구조에 관해 논할 때 ‘성’문제가 간과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자동화’가 어떻게 남성과 여성의 직업에 영향을 미치는지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 ‘로봇의 도래(The Rise of the Robotics)'의 저자인 ’마틴 포드‘는 남성이 주로 일하는 제조, 재무, 물류 등 분야의 경우 자동화의 영향을 받기 쉽다고 믿었다. 그는 가까운 장래에 '자동화'는 남성에게 부담을 지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파이낸셜 타임즈는 여성이 장래 일자리를 지배하고 ’남성의 종말(the end of men)‘이 올 것이라는 데는 의문을 나타냈다. 오히려 남성이 지배하고 있는 테크놀로지 분야는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지적이다. 미래의 노동을 남성의 프리즘을 통해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프리즘을 통해서도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