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관중들이 운집한 경기장. 링 위에 올라 3연속 잽을 날리는 선수는 다름 아닌 로봇이다. 역시 쇠와 쇠가 부딪히고, 똑같이 불꽃이 튀기고 연기가 나며, 과열된 모터와 합선된 전선들로 인해 불길에 휩싸이는 장면을 연출하며, 어느 한쪽이 더 이상 운행이 불가능 해져야 끝이 난다. 그리고 사람들은 똑같이 이 모든 광경에 흥분하고 환호한다. 오늘 ‘다시 보기’하고 싶은 이 장면은 바로 영화 <리얼스틸>의 경기 장면이다.

하늘을 가르는 어지러운 모터 소리, 플라스틱이 서로 부딪히며 깨지는 소리, 충격을 받은 배터리가 터지면서 내뿜는 매캐한 연기, 사방팔방으로 튀는 파편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에 열광하는 관중들.

2015년 10월 11일 서울. 비는 간헐적으로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고, 기온은 뚝 떨어졌다. 야외활동하기에 최악인 날씨에도 불구하고, 드론파이터들의 결전장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 드론파이트 경기는 <메이커페어 서울 2015>의 여러 행사들 중에 관객동원면에서 확실하게 월등해 보였다. ‘부딪히고, 깨지고, 터지고..’ 어느 한쪽이 더 이상 비행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싸우는 데스매치. 사람들은 왜 이런 경기에 환호하는 것일까? 그보다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2007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포트메이슨. 천정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과 상대방을 난자하는 톱날, 쇠와 쇠가 부딪히며 불꽃이 튀고, 절정은 화염방사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벼락, 어느 한쪽이 운행이 불가능 해져야만 끝나는 경기와 그리고 이 모든 장면에 열광하는 관중들. 이 날은 필자가 행사 <로보게임즈>의 하이라이트인 ‘로봇컴배트’를 처음 보던 날이다.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이 행사에서 관객동원 1위의 코너는 ‘로봇컴배트’였다. 필자는 왜 저토록 광폭한 경기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비슷한 장면은 또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좁은 우리 안에 갇힌 채 서로를 향해 곧추세운 목, 푸드덕 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꾸엑 거리는 비명, 상대의 빈틈을 찾는 살기등등한 눈빛과 상대의 살 깊숙한 곳을 노리는 발톱과 부리,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경기와 이 모든 장면에 열광하는 관중들. 어느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투계(닭싸움)의 한 장면이었다. 작고 네모난 아이패드 화면 밖으로 처절함과 환호성이 전해져 왔다. 이것도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이다.

칼과 창이 부딪히고, 살과 피가 튀기고, 맹수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살육의 매치, 그리고 이 모든 장면에 열광하는 관중들. 로마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은 지금은 옛 영광을 뒤로하고 반쯤 부서진 채 서있지만, 그 언젠가 저곳은 로마에서 가장 인기 높은 경기장이었고, 또 그곳에서 수많은 글레디에이터들이 쓰러져갔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흔하게 만나는 이런 장면들은 그 시절의 실제 역사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파이터들의 형태는 변했다. 사람에서 동물로, 로봇으로 그리고 드론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경기의 형식과, 그에 열광하는 관중들이다. 과연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에 이토록 열광하게 하는지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싶었다.

우리에게 대신 싸워줄 ‘파이터’가 필요한 이유

단서는 볼링경기에서 찾을 수 있다. 볼링은 레인의 한쪽 끝에 나란히 세워진 핀들을 다른 한쪽 끝에서부터 묵직한 공을 굴려서 맞춰 쓰러뜨리는 경기이다. 그런데 본디 이 볼링이란 경기는 인간의 파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경기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이 핀에 맞는 순간 들리는 ‘팍’하며 깨지는 소리, 그리고 핀들이 사방으로 튕겨 날아가는 장면 등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이 장면과 소리들이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파괴 욕구를 만족시켜 줌으로서, 평소에 엄한 곳에서 자신의 폭력성을 표출하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영화 <리얼스틸>은 사이가 소원해진 아버지와 아들이 로봇복싱을 통해 관계를 개선해 나간다는 진부할 정도로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하게 빠져 들어 즐길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 내내 시종일관 이어지는 로봇들의 경기 장면 때문이다. 로봇이 얼마나 화려하게 생겼는지, 어떤 방식으로 휴 잭맨의 동작을 잘 인식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모방해 싸우는지, 로봇이 주인공과 함께 춤추며 감정의 교류가 생기는지 아닌지는 그저 이 영화의 맛을 더욱 살리기 위한 조미료적인 장치들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핵심은 관객이 로봇의 격투 장면을 보면서 느끼는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다.

아주 오래전 인류가 발생했을 때부터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모든 외부의 위협에 맞서야 했다. 그리고 그 위협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에 하나가 공격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내면의 깊숙한 곳에 공격적 성향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게 진화한 것이다. 이 공격 성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다스리느냐 하는 것이 문명인과 사이코패스를 구분 짓는다.

리얼스틸을, 아니 정확히는 로봇들의 격투 장면을 다시 보기 할 때마다, 똑같은 장면이라 할지라도 늘 새롭고 흥미진진하게 느끼는 이유는 나의 내면에 그만큼의 공격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래디에이터들이, 투계들이, 로봇들이, 또 드론들이 처절히 싸우고 부서지는 모습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이제는 이해 가능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경기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제어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본 기사는 '월간로봇' 1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표기는 '월간로봇'의 규정에 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