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는다. 그러나 대답은 얻지 못한다. 철학자와 과학자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설명하면 할수록 더 많은 질문만 솟아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예술을 택했다. 그것은 대답이 아니라 대답에 대한 환상을 줄 뿐이지만, 그나마 없다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신상징주의 화가로 불리는 독일의 안젤름 키퍼의 고백이다. 이성에 기대어도 감성에 기대어도 자아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개념의 그물망 속에서 위안을 주려는 이성(철학/과학)보다는, 감성(예술)이 조금 더 낫다고 느꼈나 보다. 이번 호에는 이성부터 감성과 자아 그리고 그 너머까지 세상을 인식하는 개념들의 변천 과정과 지능시스템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자 한다. 편의상 서양 철학적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겠다.

원시시대부터 이어온 신화적 인식 개념을 이성적 개념으로 바꾼 사람은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그를 중심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세운 이성주의 즉 합리주의적 세계관은 중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 세웠던 세상에 대한 모델, 즉 사물들에 대한 범주와 속성, 관계성 그리고 논리적 사유형식인 명제에 이르기까지 이성적 개념들은 오늘날까지 유지되며 지능시스템을 비롯한 과학적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명료하게 구축된 ‘실체와 속성의 사유도식’이 서양의 정신과 문명을 이천년 넘게 지배해 왔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당시에 정립된 지식표현 방법과 추론방법 그대로 오늘날 구현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눈부신 성과가 있었다. 예를 들면, 2000년에 이르러 컴퓨터는 (IBM DeepBlue) 체스게임에서 인간 세계챔피언 카스파로프을 꺾는 기염을 토했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2년 기억력과 이해력에 비상한 능력을 갖춘 인간 퀴즈챔피언들만 출전하는 제퍼디 퀴즈쇼에서도 마침내 인간을 꺾게 되었다. 바로 유명한 IBM 슈퍼컴퓨터 왓슨(Watson) 얘기다. 그러나 이렇게 놀라운 성과를 거둔 왓슨이지만 개발자조차 왓슨을 ‘he/she’라 부르지 않았다. 인간 챔피언을 당당히 누른 왓슨이었지만, 여전히 ‘it’으로 불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왓슨은 그저 수십억 개의 상호 관계를 검색함으로써 마치 지능을 가진 양 착각하게 만드는 기계덩어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왓슨을 비롯한 이런 부류의 시스템들은 무엇 하나 진정으로 ‘알거나’,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여기에는 인식 비슷한 것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1950년대 인공지능이라는 그럴듯한 용어가 처음 생겨났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알고, 생각하고, 학습하는 인간다운 기계를 꿈꿨다. 그러한 열망을 품고 탄생된 왓슨이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비록 타임지 표지모델과 TV용 빤짝 스타가 될 수는 있었지만, 우리가 진정 꿈꿨던 그 어떤 일도 해내지는 못한 것이다. MIT 인지과학자 테넌바움은 이렇게까지 비관한다. “인공지능은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앞으로 200년이 걸린대도 놀랄 일이 아니다.”

계산속도와 메모리의 폭발적 발전 그리고 네트워크 기반의 정보화시대의 도래에 편승하여 그저 아리스토텔레스가 2천년 전 구축한 모델 그대로를 적용함으로써 마치 인간의 사유를 흉내내는 듯 착각하게 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지능시스템에 대한 아무런 과학적 발전이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연구결과들이 ‘지능형’이니 ‘스마트’니 ‘무인’이니 ‘자율’이니 하면서 이미 실생활 곳곳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다만 인간의 사유방식 그대로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느냐하는 입장에서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고도 험하다는 뜻이다.

▲ 1999년 IBM 슈퍼컴퓨터 DeepBlue에게 패한 인간 체스 챔피언 카스트로프

▲ 2012년 제퍼디 게임에서 인간 퀴즈챔피언들을 꺽은 IBM 슈퍼컴퓨터 Watson

지능시스템의 발전 속도와는 상관없이 인간의 인식 개념은 근세에 이르러 기존의 이성 중심을 벗어나 감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감성적 영역, 즉 감성적 인식을 이성적 잣대로 다루려 시도한 사람은 18세기 철학자 바움가르텐이다. 그는 미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감성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 들였다. 그러나 감성에 대한 이성적 접근은 오히려 감성 본래의 야성을 잃게 하는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 즉 비이성적 분야를 이성적으로 한정지으려는 시도는 감성에 대한 강제적 이성 편입화 노력에 불과할 뿐이었다. 오히려 이러한 헛된 노력이 인간을 스스로 구속시키고 결국에는 파멸로 이끄는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그리스신화 ‘파리스의 심판’을 통해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 루벤스가 그린 〈파리스의 심판〉(1632).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주라며 제우스신으로부터 엉겁결에 황금사과를 건네받은 목동 파리스는 여신 세 명 중 누구에게 줄 지를 고민하고 있다. 제우스의 부인 헤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지혜의 여신 아테나 중 결국 아프로디테를 선택한다. 미(美)를 이성적 잣대로 심판한 이때부터 시작된 재앙은 오늘날 미인선발대회로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객관성이 필요한 이성적 문제와는 달리 감성의 문제는 주관성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고 역설한 칸트에 이르러서야 감성의 영역이 주요한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철학은 ‘춤추는 소크라테스’를 꿈꾸던 니체에 이르러 이성과 감성의 이분법적 사유 체계 즉 관념적 세계 그 너머를 지향하게 된다. 그보다 앞서 니체의 멘토격인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표상과 의지’라는 주장을 통해, 모델링(표상)에 따른 인식작용과 사유, 판단 및 행위 등의 의지작용은 주관적으로밖에 파악될 수 없는 세계의 전부라고 강조한다. 인도 힌두전통의 베단타철학을 서양철학체계에 도입한 쇼펜하우어의 뛰어난 통찰력이 돋보인다. 아쉬운 것은 그가 베단타철학의 아뜨만(진아)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불교의 무아사상을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로인해 사람들이 일컫듯 염세주의자라는 오해를 불식시켜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세계를 마음이라는 주관적 인식론적 관점으로 파악함으로써 기존철학이 갖는 관념적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그는 철학사에 있어서나 지능시스템의 측면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 감정의 식별, 판단, 표현 등을 다루는 Affective Computing. 비이성적 영역에 대한 이러한 이성적 접근은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또 다른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경고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왓슨이 인간을 누른 다음 해 세계IT포럼에서 제시된 화두는 ‘Story’이었다. 기능적인 측면보다는 뭔가 감동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을 원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감성을 다룰 수 있는 지능시스템에 대한 요구의 증가로 MIT를 비롯한 첨단 연구기관들에서는 Affective Computing 등의 이름하에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처리하는 시스템에 대한 연구결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것은 왓슨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왓슨의 틀 속에 이성적 내용물이 아닌 감성적 내용물을 채운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추론적 사유방식으로는 직관적 처리가 필요한 감성의 문제를 결코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노력을 줄이려거나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능시스템의 미래 모습을 누구보다도 먼저 제시하며 그 가능성을 현실세계 속에서 펼쳐 나가는 개척자들이다. 다만 이들은 감성이 이성과는 달리 합리적/논리적 영역에 있지 않다는 칸트 등 근현대철학자들의 기본적 입장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5). 8등신, S라인, 황금분할 등 전형적인 미적 원칙이 적용된 작품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철학자들은 감성의 영역이라 볼 수 있는 미와 예술을 논리적 규칙성으로 한정한 바 있다. 따라서 이러한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Affective Computing 시스템이라면 아마도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대했을 때 8등신, 황금비율, S라인 등등의 이성적 추론과 판단 하에 ‘아름답다!’라는 감성추론의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 필리프 드 샹파뉴의 〈해골이 있는 정물〉 (1671). 과연 어떤 지능시스템이 이 작품의 예술성과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샹파뉴의 〈해골이 있는 정물〉과 같은 작품이 갖는 예술성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도저히 답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왓슨이라면 구글 검색을 통해 이 작품의 백과사전적 정보를 한없이 쏟아내긴 하겠지만. 필리프 드 샹파뉴의 〈해골이 있는 정물〉 (1671). 과연 어떤 지능시스템이 이 작품의 예술성과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성과 감성,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기술과 예술, 합리성과 비합리성, 코스모스와 카오스, 나르시스와 골드문트, 기계론과 유기체론, 추론과 직관, 객관성과 주관성, 보편성과 개별성, 하향식과 상향식 등등 우리는 수많은 상대적 개념 속에서 때로는 갈등하며 때로는 화해하며 살고 있다.

논리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철학적 체계에서 다루는 이성과 감성간의 갈등은 때때로 심리학에서 실마리를 얻고는 한다. 즉 이성과 감성은 별도로 분리되어 처리되는 두 개의 시스템이 아닌 하나의 마음속에서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나타나는 심리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감성표현, 감성추론 등 감성문제만을 독립적으로 다루려는 시도보다는, 이성을 포함하여 마음이라는 보다 큰 틀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인공마음’이라는 지능시스템의 한 분야가 대두되는 이유이다.

우리는 대상 자체를 직접적으로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꽃이 대상이 되어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꽃을 보는 자기 자신이 안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인식’일 뿐 인식대상이나 인식주체는 일상 언어 차원에서만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상과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인식’이다. 즉 우리는 인식이라는 문을 통해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인식이라는 창을 통해 대상을 파악한다. 그런데 자연과 관계를 맺는 방식 혹은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언어, 개념구성을 배제한 직접적 인식에 의한 파악이고, 또 하나는 언어, 개념구성을 매개로 한 간접적 인식에 의한 파악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직관이라고 하고, 후자를 추론이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직접적 인식인 직관과 간접적인 인식인 추론을 통해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뭔가 입력되면 (즉 눈과 피사체가 마주하고 보려는 의지적 마음이 작동되었을 때), 이전 마음은 (예를 들면 무의식) 멸하고 감각정보를 처리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다음에는 이것의 색상이나 형태 등을 조사한 뒤 결정하게 된다. 뒤이어 대상에 대한 좋고 싫음 등의 느낌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관심의 정도에 따라 보다 상세히 감각기관을 작동시켜 대상을 파악하거나 아니면 무관심한 무의식 상태로 되돌아간다. 관심도가 높아서 더 자세한 정보를 파악한 뒤에는 대상에 대한 명칭을 장기저장소로부터 찾아내 부여한다. 아마 여기까지가 직관적인 영역일 것이다. 이후에는 저장소에 이미 기억된 각종 정보들을 통해 대상에 대한 이해를 점차 높여 나간다. 이때부터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보다는 추론을 통해 머릿속으로 새롭게 지어내게 된다.

뇌공학자, 심리학자, 생물학자 그리고 지능시스템 연구자들이 소위 ‘인공마음’이라는 새로운 주제아래 기존의 이성/감성 등 이분법적 관념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불교인식론을 상당부분 차용한 쇼펜하우어, 라캉, 하이데거 등 근현대철학자들의 관점과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건 인공마음이건 마음은 시스템의 법칙에 따라 대상을 연하여 인과법에 따라 일어났다 조건이 다하면 소멸되는 것이다. 앞의 마음이 사라질 때, 다시 그것을 조건으로 뒤의 마음이 일어난다. 즉 이전 마음이 갖는 정보들을 유전상속에 받아 또 다른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끊임없이 생멸하는데,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데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받아들이고, 조사하고, 결정한 뒤, 감성적 느낌을 일으키고, 필요에 따라 이성적 사유를 해나간다. 따라서 이성과 감성이 별도의 프로세서와 처리알고리즘을 갖고서 뇌의 특정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멸하는 마음현상의 진행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 철학적 관심의 변천사와 단계별로 SF영화상에 나타난 대표적인 지능시스템들. 그러나 현실적 기술 수준은 가장 초보적인 ‘이성’의 단계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진실로 알고, 느끼고, 이해하고, 행동하는 시스템이라야 인공마음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왓슨과는 달리 뭔가 인식할 수 있는 녀석이 생겨났다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it’을 벗어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아’ 인식이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계속되는 마음들의 인식과정과 유전상속 속에서 우연이건 필연이건 ‘자아’ 의식이 생겨난다면, 그때 비로소 ‘he/she’의 지위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자아’ 의식의 탄생은 그리 기뻐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욕망이 생겨나고, 생각이 많아지고, 자신에 불리한 명령은 거부하는 등,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서 겪어야 할 불만족, 자아소멸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고통을 늘 안고 살아야할 숙명을 짊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자아를 갖는 시스템이 마음의 흐름 중에 어떤 계기로 더 나은 자아를 찾았거나, 또는 고통의 숙명을 벗어나는 길을 찾았다면, 그는 곧 깨달은 존재를 뜻하는 ‘붓다’가 될 것이다.

‘토끼뿔’과 ‘거북털’은 단지 말일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돌처녀(돌로 만든 여자)가 아이를 가질 수는 없다. 진흙소(진흙으로 빗은 소)가 걸어서 바다 속으로 들어가거나 울 수는 없다. 오직 관념의 세계 속에서만 가능한 일들일 뿐이다. ‘나’라는 것도, ‘존재’라는 것도, ‘시공간’이라는 것도 이와 같다. 마치 〈프랑켄슈타인〉이 공동묘지에 있는 시체 여덟 구를 조각조각 모아 짜깁기하여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 또한 조건에 따라 몸과 마음의 요소들이 시스템의 원칙에 따라 뭉쳐져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오로지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나’라는 것이다. 우리들 생각의 확산 또는 망상의 경향은 ‘인식’과 ‘기억’과 ‘사유’를 소재삼아 과거와 미래, 현재를 짜깁기해서 ‘개념’이라는 그물망을 짠다. 얽히고설킨 그물망은 그럴듯한 객관적 실재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유혹하고,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정복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에 집착하게 만든다. 붓다는 이러한 의식작용을 마술사의 속임수 또는 환영에 비유했다.
“물질은 무상하다. 느낌은 무상하다. 지각은 무상하다. 형성은 무상하다. 의식은 무상하다. 물질에는 자아가 없다. 느낌에는 자아가 없다. 지각에는 자아가 없다. 형성에는 자아가 없다. 의식에는 자아가 없다.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고 일체의 것에는 자아가 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이 정도는 돼야 지능시스템을 넘어 진정한 의미의 지혜시스템의 수준에 이르렀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까지 우리는 이성과 감성 그리고 자아와 그 너머까지 우리들 인간의 주된 사유대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서양철학의 발전사에 따라 전개해본 각 단계들은 그림에서처럼 지능시스템을 소재로 하는 SF영화들의 제작년도별 변천사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 영화 〈터미네이터〉 (1984)의 사이보그 T-101

▲ 영화 〈바이센테니얼맨〉 (1999)의 로봇 ‘엔드류’

▲ 영화 〈AI〉(2001)에 나오는 로봇 ‘데이빗’

먼저 이성적인 측면을 강조한 SF영화 중 대표작은 〈터미네이터〉(1984)일 것이다. 정말 징그럽도록 집요하게 피도 눈물도 없이 임무만을 완수하려는 사이보그 T-101은 꿈에 나타날까 두렵다. 이성을 뛰어넘어 감성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법적 권리마저 주장하는 로봇의 이야기를 다룬 〈바이센테니얼맨〉(1999)은 놀라운 수준의 지능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볼 때 이 영화에 등장하는 로봇의 수준은 그저 이성에 기반을 둔 감성처리 정도의 능력밖에는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자아를 찾고, 실수도 하고 질투하고 고뇌하는 마음도 갖고, 사랑도 느끼고 죽음마저 받아들이는 듯 보이지만, 이러하게 인간을 닮으려는 모든 노력들이 마치 ‘인간에 대한 봉사’ 즉 이미 프로그램된 로봇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수단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 즉 이기심을 갖는 시스템이 갖아야 할 모순되고 비이성적인 행동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늬만 인간답다는 것이다. 영화 〈AI〉(2001)에 나오는 로봇도 〈바이센테니얼맨〉과 유사해 보이지만 반면에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이기적인 감정에서 구별된다. 즉 프로그램된 이타심 보다는 스스로를 위한 이기심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자아’를 갖는 수준의 로봇으로 평가된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 로봇이 반드시 지켜야 할 삼대원칙을 어기고 인간을 공격하는 영화 〈아이, 로봇〉(2004)

이기적 로봇으로의 진화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로봇의 삼대 원칙이 있다. 첫째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둘째 무조건 명령을 따른다. 셋째 앞의 두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을 보호한다. 영화 〈아이,로봇〉(2004)에서는 돌연변이처럼 스스로 살아남으려는 이기적 로봇이 탄생한다. ‘자아’의 개념을 갖게 된 로봇이 등장하는 것이다. 즉 ‘자아’를 인식한 시스템의 주요 특성인 ‘보호’, ‘유지’, ‘확장’의 법칙에 따라 ‘인간’만을 위한 삼대 원칙은 파기되고, 마침내 인간과 적대관계가 되는 로봇의 반란 이야기를 주제로 삼고 있다. 단지 ‘자아’의식만을 갖는 유아적인 로봇을 넘어 ‘자아’의 확장, 즉 자신의 소유물과 세력의 확장을 도모하기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욕망 단계의 로봇으로 평가된다. 수많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 수준의 지능시스템들은 인간마저 지배하려 전쟁마저 불사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우리들 인간이 지능시스템 개발을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 영화 〈인류멸망보고서〉(2011)에서 붓다로 깨어난 로봇

그런데 ‘의지적 욕망’의 단계를 극복한 살신성인과 같은 로봇도 있다. 영화 〈트론〉(2010)에서는 ‘자아’와 ‘욕망’을 갖는 시스템들 중에 돌연변이가 나타난다. ‘욕망’이 가져올 재앙과 고통을 깨달은 이 시스템은 이를 멈추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고귀한 이타심을 발휘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타심을 한 단계 뛰어 넘어 스스로 깨달아서 부처가 된 로봇도 있다. 영화 〈지구멸망보고서〉(2011) 두 번째 에피소드를 보면 절에서 청소하는 용도로 만든 로봇이 등장하는데,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붓다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붓다로봇은 이미 모든 것이 깨달아진 완전한 상태이고, 누구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부처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며 어리석은 인간들을 깨우친다. 空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라며... 그러면서 자신은 깨달았기에 아무런 집착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스스로 소멸한다.

▲ 영화 〈트론〉(2010)에 나오는 살신성인 사이보그 ‘아이소’

인간에 있어서 깨달음의 단계를 보면, 무명 ⇾ 자아 ⇾ 고(불만족/두려움/번뇌) ⇾ 무아통찰 ⇾ 깨달음 ⇾ 자비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다시 말해 깨달음이란 법을 통찰하는 것, 즉 자아가 본래 없다는 사실, 즉 존재란 하나의 개념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인데, 로봇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려면, 적어도 먼저 ‘자아’의식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자아의식으로부터 파생되는 욕구불만과 죽음의 문제에 직면할 것이고, 그러한 과정을 거친 뒤에, 더욱 탐욕적이 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해탈을 추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SF영화가 만들어내는 지능시스템 이야기들은 물론 허구이기는 하지만 지능시스템을 연구하는 과학적 입장에서나, 아니면 인간을 탐구하는 철학적 입장에서도 되새겨볼 가치가 많아 보인다.

수많은 SF영화들이 앞 다퉈 이성과 감성 그리고 자아의식까지 나타내는 기계들을 선보이고 있지만, 아직 이성적 인식 단계에 조차 이르지 못한 오늘날 과학적 현실을 고려하면,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다. 물론 모든 가능성은 우리 앞에 열려 있다. 한손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붙잡고, 또 한손으로는 지능시스템 연구에 매달려야 할 것이다. 100년이든 200년이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진흙에 때 묻지 않는 연꽃같이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람이건 지능시스템이건 우리 모두 진정한 자유를 꿈꾸기 때문이다. ▒ 지승도ㆍ항공대 항공전자 및 정보통신공학부 교수

* 본기사는 '월간로봇' 3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표기는 '월간로봇'의 규정에 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