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는 해봤으니 이제는 새로운 꿈 꿀 때”

"한번 꽂히면 결과를 보는 것, 그것이 내 힘의 원천"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의 포용력과 안목 지금도 “존경”
매년 혁신적인 제품 하나씩 나오게 되는 날 “은퇴”

고광일 고영테크놀로지 사장(58)은 ‘한번 꽂히면’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마는 성격이다. 대학 1학년때 만난 부인도 첫눈에 반해 결혼에 이르렀다. 로봇업계에 몸담은 것도 그렇게 한눈에 꽂혀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몸담았던 금성산전과 미래산업은 물론이고 지금의 고영테크놀로지에서도 그가 꽂혀 만든 세계 1등 제품이 한둘이 아니다. 최근에 그가 꽂힌 분야는 메디컬 로봇이다. 고광일 사장을 직접 만났다.

처음부터 제어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핵물리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어렸을 때였으니까요.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를 꿈꾸었었나 봅니다. 이휘소 박사가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노벨상에 대한 동경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야로의 대학진학은 아버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 보다는 아버지께서 단순히 핵에 대한 반감이 있으셨어요. 곁에서 매형도 거들었고요. 계열별로 공부하던 신입생 때는 전자계학 계통에 관심이 모아지더라고요. 핵물리와도 무관하지 않고요. 그래서 2학년 진급 때 전기공학과를 선택했고 제어 분야로 관심 범위를 좁혔지요. 그때는 또 미사일 실험 계획들이 발표되던 시절이에요. 미사일 제어에 관심 많았었거든요. 대학원(석사)진학할 때는 마침 서울대에 제어계측공학과가 만들어져서 자연스럽게 제어를 전공으로 택했지요. 그때까지도 국내 대학에서는 로보틱스 과목은 없었어요. 용어조차도 생소했고요.

어떻게 로봇에 꽂히게 됐나요?
석사과정 때부터 촉탁연구원으로 한국전기통신기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 다녔어요. 졸업 후 정식연구원이 돼 전전자교환기(TDX)개발팀에서 일하게 됐는데, 어느 날 금성사(현 LG전자)에서 로봇팀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가 났어요. 아크용접 로봇하고 조립용 로봇 그림이 광고에 있었는데 매니퓰레이터였죠. 눈에 확 띄었어요. 제어를 전공한 저로서는 신선하면서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봇은 제어의 꽃이잖아요. 제어에서 가장 어려운 게 로봇이기도 하고요. 한마디로 그 신문광고에 꽂힌 겁니다. 그렇게 해서 로봇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게 1983년입니다. 한눈에 꽂히면 결과를 보고 마는 것, 제 성격이자 내 힘의 원천인가 봅니다. 대학 신입생 때 와이프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결혼까지 했어요.

당시 금성사에는 로봇 전문가들이 많았습니까?
입사하니까, 중앙연구소에 부 단위의 조직이 있었고 그 아래 막 로봇팀이 만들어지는 단계였어요. 그래도 누군가 한 사람쯤은 전공자나 전문가가 있을 것 같아 기대했는데 부장과 팀장은 물론이고 로봇에 대해 아는 분이 아무도 없었어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어요. 국내에서는 그런 학문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저도 그 즈음에 로봇이란 용어를 듣기 시작했으니까요. 금성사에서도 로봇팀이 만들어진게 아래로부터의 발의가 아닙니다. 당시는 국내 전자회사들이 일본하고 기술제휴를 통해 제품을 생산하던 시절입니다. 어느 날 구자경 회장이 일본 출장중에 히타치가 제작한 로봇을 봤어요. 일본에서는 그때 퍼스컴 애플리케이션으로 소형로봇을 만들어 프로모션 하던 시절이었어요. 구회장이 그걸 구입해서 연구소에 던져주고 숙제를 준 겁니다. 중앙연구소에서 이런 사업을 꼭 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연구소장이 급하게 광고 내서 사람 뽑고 팀을 만든 겁니다. 로봇을 아는 사람이 없을 수 밖에요!

▲ 제6회 언스트영 상 최우수 기업가상(2012년). 맨오른쪽이 고광일 사장

그렇게 해서 5관절 로봇을 개발해냈습니다.
처음엔 아무도 모르니까, 공부하고 세미나 여는 게 로봇팀의 하루 일과였어요. 로봇 이론은 굉장히 수학적이어서 수학 모르면 시작도 못해요. 그런데 당시 부장이나 팀장은 수학을 잘 할 수가 없잖아요. 수학 잘하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게 바로 저였어요. 무슨 코미디처럼 신입사원이 들어오자마자 리더가 된 겁니다. 첫 작품인 5관절 소형 로봇은 그렇게 공부해서 6개월 만에 개발했어요. 한국식으로 무조건 밀어 부치니, 뭐 어렵진 않았어요. 팀원들이 의욕도 넘쳤고요. 다만 일본 제품이 샥샥샥 돌아가는데 반해 저희 것은 질질질 소리가 났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그때는 카피만 할 수 있어도 잘한다는 소리 들었어요. 양산해서 금성사 사업장에 공급했고 학교 연구용으로 많이 팔았어요. 또 그걸 계기로 로봇시장 수요조사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론에도 소개돼 청와대에 까지 불려가 대통령 앞에서 시연하는 일도 벌어졌어요.

승승장구했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유학을 떠났습니다.
사실 그 로봇은 별거 아닌데 대단한 것처럼 알려지니까 회사에서도“다 할 줄 아네, 제법이다!”라는 반응이 나와요. 그런데 문제는 그걸 계기로 그룹 차원에서 진짜 숙제가 떨어진 겁니다. 구회장이 이번에는 히타치의 용접용 로봇을 사가지고 왔어요. 처음엔 그런 로봇 개발하는 게 뭐가 어렵겠느냐고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그때 저희는 모두 선무당이었잖아요! 개발을 시작했는데, 이건 차원이 다른 겁니다. 로봇을 뜯어보니 키네메틱스 구조부터 우리가 공부했던 교과서에 없는 겁니다. 왜 그런 구조를 가져 갔는지, 디자인 필로소피가 무엇인지, 링크를 설계하면 그 두께가 왜 2밀리미터가 돼야 하는지, 어떤 곳에서는 직선이 돼야 할 텐데 왜 리브(rib)가 돼 있는지, 그렇다면 이게 아트인지 공학적 설계인지, 이런 걸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또 거기서 하모닉 드라이브라는 게 튀어 나왔는데, 그것 다루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서보모터도 그때 처음 봤어요. 달달거리는 스텝핑 모터나 인덕션 모터만 쓸 때에요. 제어기를 보는 순간에는 숨이 멎는듯했어요. 한국전기통신기술연구소에 있을 때 봤던 TDX 수준이에요. 캐비닛에 랙들이 가득 꽂혀 있는 교환기는 그 자체가 컴퓨터시스템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컴퓨터 아키텍처 기초도 모르고 기계해석도 안되고 키네메틱스도 안풀려요. 자습한 실력으로는 용접용 로봇 개발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한계를 느끼고 미국 유학을 결정한 겁니다. 진짜 공부를 해서 로봇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금성사 입사하고 2년만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어떤 분야를 공부했습니까?
처음에는 플로리다주립대 대학원에 입학했어요. 거기에 제어 분야의 최고 이론가인 칼만교수님이 계셨어요. 그분의 제어 이론은 항공기, 크루즈 미사일, 우주선 분야 등등 지금도 안 쓰이는 데가 없어요. 로봇 제어는 당연하고요. 그분에게 개인적으로 이력서를 보냈죠. 그분이 저를 뽑은 것은 로보틱스 연구가 목적이 아니에요. 제가 산업체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분 입장에서는 자신의 이론을 새롭게 적용해보고 싶었던 거죠. 물론 제가 그분의 직접 제자는 아니에요. 지도교수로 모셨던 분은 그분의 수제자인 케이맨 교수입니다. 도중에 케이맨 교수가 피츠버그대학으로 옮겼는데 저도 따라갔죠. 유학초기에는 제어 이론은 다 안다고 생각해서 컴퓨터아키텍처와 인공지능 공부를 하기로 했어요. 금성사에서 일할 때 가장 막혔던 부분이니까요 그런데 컴퓨터사이언스는 아직 PC가 보편화되기 전이라서 그런지 체계가 없었어요. 1년 강의 듣는 정도로 하고 제어 분야로 더 깊이 들어갔죠. 당시 미국에서는 크루즈미사일을 개발하던 때라서 교수님이 국방부 프로젝트 따오면 알고리듬을 개발하고, 항공기 회사 프로젝트도 했어요. 크루즈미사일, 항공기, 로봇 분야 제어 이론들은 다 같으니까요. 학위 논문 주제도 거기에서 나왔고요. 유학전의 필드경험이 연구와 학업에 큰 도움이 됐어요. 강의를 듣는 대로 머리에 쏙쏙 들어와요. 수학 이론을 듣는 순간 머리 속에는 벌써 제어 구조가 딱 떠오르는 식이에요. 다른 학문은 몰라도 공학분야에서는 박사학위 이전에 필드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신한투자금융이 주최한 홍콩투자설명회 참가(2011년). 오른쪽에서 두번째까 고광일 사장

미국 체류와 귀국을 놓고 고민하지 않았나요?
사실은 유학기간 동안 학교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서 금성에서 지원해준다는 것을 마다했어요. 그러니 유학 마치고 복귀할 의무는 없었지요. 미국에 남을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금성에서 모시던 부장님이 집요한 분이었어요. 그분이 저를 예쁘게 봐서 그랬는지 유학기간 동안 저를 관리하대요. 이를테면 금성 사장단 멤버나 CTO가 미국 출장 갈 때 마다 제 주소를 주고 들러서 격려해주라는 식으로 부탁을 해요. 그러면 그분들이 저희 집에 들렀다가 저한테 좋은 말들을 해주고 가는 겁니다. 그런 일이 1년에 2~3번씩 있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그런 인정과 배려를 모른 체 할 수 없잖아요. 게다가 제가 상사로 모시던 분이었고요. 그분이 나중에 LG디스플레이 연구소장을 역임했던 이춘래씨입니다. 하여튼 학위논문 제출한 그 다음날 비행기타고 귀국했어요. 그렇게 돌아올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금성사에서 학비 지원을 받았을걸 그랬어요. 하하하.

복귀한 곳이 금성산전이었지요?
1989년 돌아와보니 금성사 산업전자부문이 금성산전(현 LS산전)으로 분사돼 있었어요. 예전 금성사 중앙연구소의 팀들도 그대로 옮겨왔고요. 당시 금성산전은 조직이 작지 않았음에도 아주 잘 돌아갔어요. 로봇은 일종의 종합 예술이잖아요.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려면 기계, 모터, 전력전자, 제어, 소프트웨어, 컴퓨터아키텍처, 인공지능 분야에서 최고들이 모여 있어야 하잖아요. 금성산전에 그런 조직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어요. 금성사 시절과는 완전히 딴판이더라고요. 제가 속한 산업기계연구실 옆에 전력 전자실, 공정제어 연구실, 비전연구실 이런 조직들이 쭈욱 있어요. 어떤 프로젝트를 던져줘도 다 만들어 낼 수 있는 체제가 돼 있는 겁니다. 처음엔 진짜 신나게 일을 했어요.획기적인 것들도 많이 개발했어요. 당시 소니의 스카라 로봇이 굉장히 성능이 좋다고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저희는 그것보다 속도는 1.5배 빠르고 제어기도 PC메인보드 만하게 줄인 로봇을 만들었어요. 랙도 필요 없게 만들었지요. 이를테면 코스트 아키텍처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겁니다.

그런데 결국 금성산전을 떠나게 됐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금성산전 자동화연구소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100여명이었어요. 분위기도 아주 좋았고 팀워크도 괜찮았어요. 제가 이끌던 산업기계연구실만 해도 함께 일했던 연구원 2명은 지금도 저와 함께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갈수록 일이 많아지고, 연구소장이 새로 오고 조직도 개편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주력사업도 바뀌고요. 결국 문제는 수익이 안 생긴다는 거였어요. 앞서 얘기한 스카라로봇만 해도 그래요. 그렇게 열심히 개발한 결과가 양산 단계에 가면 막혀 버려요. 국산부품이 없어 양산하려면 일본에서 고가의 부품들을 구입해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업부서가 사업성을 따져요. 리스크를 떠맡기 싫으니까요. 그런 저런 과정 거치다 보면 열심히 개발한 제품들이 사업화까지 가는데 몇 년씩 걸려요. 그게 당시 연구부문하고 사업부문하고 분리돼 있던 국내 대기업들의 한계였어요. 결국 이런 핑계, 저런 꼬투리가 많아지면서 연구소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해요. 평생 R&D만 하다 욕만 먹고 인생 끝나겠다, 뭐 그런 기분이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그런 조직은 끝난 거잖아요.

▲ 세계시장 1위인 3D 납도포검사기 부품을 들고 활짝 웃는 고광일 사장

대기업에서 벤처기업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연구소 동료들이 어디로 옮겨가야 할까, 술렁거려요. 오라는 데는 많았어요. 금성산전 산업기계연구실 연구팀 실력은 전세계급이라고 업계에 소문이 났었거든요. 그런 팀이 오겠다는데 싫다는 회사가 없잖아요. 그 가운데는 대우 고등기술연구원이나, 삼성테크윈도 있었어요. 그런데 동료들의 얘기가 이제 대기업은 가기 싫다는 거에요. 직원 관리방식이 금성이나 삼성이나 거기서 거기일 거라는 얘기죠. 우리가 개발한 것을 목숨 걸고 상품화 해주고, 그래서 성공하면 엔지니어들이 대우받는 곳을 찾아가자는 겁니다. 저는 그때까지 미래산업이 어떤 회사인지 몰랐어요. 벤처기업의 속성도 잘 몰랐고요. 그 즈음 미래산업으로 옮겨갔던 한 동료가 있었는데, 거길 적극 추천하는 겁니다. 일단 가보라는 거에요. 그래서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당시는 사장)하고 연결된 거에요. 그러니까 미래산업은 제가 결정했다기 보다는 동료들이 선택해준 셈이에요. 1차로 30명이 옮겨갔어요. 또 2차로 10명…그렇게 해서 결국 금성산전에 있던 100여명의 연구인력이 6개월 만에 미래산업으로 다 옮겨왔어요. 물론 그전에 금성산전은 자동화 사업을 포기한 상태였고요. 그게 IMF구제금융이 시작됐던 1997년 말에서 1998년 초의 시기였습니다.

당시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제가 갈 때 별도의 사업계획서를 갖고 갔어요. 정 회장은 처음부터 “마음껏 해봐라” 였어요. 저희 계획에 모든 것을 다 걸겠다는 겁니다. 지금도 그분이 존경스러워요. 저 같으면 그 상황에서 그렇게 못했을 겁니다. IMF구제금융 초기라 삼성도 포기하고 대우도 포기하고 다 포기하던 시절이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세계 최고 수준의 메카트로닉스 팀을 구축해보겠다는 제 꿈을 믿어주었어요. 결국은 그분의 배포와 안목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30명의 조직을 100명으로 늘리고, 나중에는 알짜배기 연구원들만 140명까지 키울 수 있었어요. 금성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정회장의 인덕을 보고 뛰어든 박사급 인재들이 수두룩했어요. 정회장은 예산 같은 거 개의치 않았어요. 아마도 메카트로닉스 연구원들로만 140명을 채운 조직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을 겁니다. 그들을 맡아 이끌었던 저도 행복했고 그들도 행복한 시절이었어요. 지금도 웬만한 국내 장비회사들의 핵심 인력들은 거의 그 시절 미래산업 출신입니다. 결과적으로 정문술 회장이 산업발전을 위해 애국을 한거죠.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미래산업에서 많은 성과를 냈습니다.
신사업으로 시작했던 마운트 부문 매출이 막 올라갔어요. 마운트 사업을 10년 넘게 해오던 삼성테크윈의 연간 매출액이 400억원대였는데 저희는 제품개발을 끝내고 시장에 내 놓은 첫 해에만 750억 원을 기록했어요. 당장 세계 4위로 올라섰어요. 기존 조직이 했던 핸들러 사업도 제가 맡아서 세계 1위로 올려놨어요. 핸들러사업을 맡게된 스토리가 있어요. 정회장이 저희가 열정적으로 일하는 걸 보더니 욕심이 생겼나 봐요. 하루는 저를 부르더니 기존의 핸들러가 어떤 수준인지 냉정하게 분석을 해달래요. 그래서 분야별 최고들만 뽑아 아주 두툼한 보고서 한 권을 만들어 올렸어요. 한마디로 ”이게 무슨 팔려고 만든 장비입니까?”라는 내용이었어요. 실제로 핸들러를 진단해보니까 낮 뜨거울 정도에요. 예를 들어, 베이스 프레임은 스틸 구조로 무겁게 가고 위는 가볍게 알루미늄으로 가져가거든요. 그런데 거꾸로 위가 더 무겁게 돼 있어요. 남의 것을 카피할 능력과 아이디어는 있는데 엔지니어링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구조해석과 키네메틱스가 어떻고, 모터는 왜 이 용량의 것을 선정했는지에 대해 아무도 답을 못해요. 보고서를 보고 그 조직의 최고책임자인 연구소장이 단단히 화가 났겠지요. 그렇게 잘 알면 직접 만들어 보라고 저한테 퍼부어요. 실력으로 보여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정말 젊었을 때에요. 그렇게 해서 새 핸들러를 개발하는 숙제가 떨어졌어요. 즉시 팀을 만들어 4달 만에 그 숙제를 끝냈어요. 발표회 때 천안 본사 사람들이 다 올라왔어요. “하면 얼마나 했겠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요. 당시 최고로 평가 받던 일본의 어드밴티스트 제품이 시간당 3000개의 핸들링을 할 수 있었는데 저희가 4달 만에 5000개를 핸들링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든 겁니다. 게다가 최적화까지 해서 소음과 진동까지 없앴어요. 발표회를 지켜본 연구소장이 저를 조용히 뒤로 부르더니 눈물을 쏟아요. 당시 그분은 부사장급이었고 나이도 많았어요. 제 손을 꼭 잡더니 R&D는 이제부터 젊은 당신들이 하라고 해요. 결국 나중에는 재무와 영업을 제외하고는 그분이 맡던 연구의 업무를 제가 맡았어요.

▲ 4000번째 인라인장비 납품 발표회(2012년 4월)

5년 만에 다시 미래산업을 떠나게 됐어요.
제가 미래산업에서 재직했던 5년 동안 했던 R&D만 42종입니다. 그런데 그많은 사업을 떠맡게 된 것은 미래산업으로서는 행운이었겠지만 저로서는 실수였고 과욕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말려든 거에요. 기존 사업에 개입하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계획했던 일에 매진할 기회가 그만큼 줄어드는 거잖아요. 의욕이 앞서다 보니 건강도 나빠졌고 업무가 많아지다 보니 관리가 소흘해 졌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문술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물러나게 돼요. 그게 2001년 정초입니다. 그러면서 정회장은 저하고는 스타일이 정반대인 분에게 후임 CEO를 맡겼어요. 저한테는 그분하고 잘해보라는 말만 남기고요. 정회장이 후임 경영진을 그런 구도로 짠 것은 일단 저한테 원인이 있다고 봐요. 연구소장으로서 회사 업무의 80%가량에 관여하고 있었던 저는 앞으로 회사가 어떻게 나갈 것이라는 로드맵을 다 그려놨었어요. 그래서 새벽 2~3시까지 일했고 연구원들도 새벽 4~5시에 집에 갈정도로 열정이 많았어요. 그때는 솔직히 제가 CEO를 하는 게 맞지 않았나 싶었어요. 열정적으로 일한다는 것은 시행착오도 많고, 그래서 배워가면서 극복해간다는 의미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정 회장에게는 굉장히 불안해 보였었나 봅니다. 그런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건데요. 정회장은 제가 좀더 내공이 쌓여야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던데 그 때 선임된 CEO가 3년을 못 채웠었어요. 그 이후로도 CEO가 5번인가 바뀌었어요. 정회장이 미래산업에 심어 놓은 기업문화는 그렇게 쥐어짜는 게 아니었어요.

그 모든 시행착오와 경험을 고영테크놀로지 창업에 쏟아 부었어요.
퇴임전 정회장이 그러대요. MBA하고 오면 어떻겠느냐고요. 그런데 그걸 하고 왔으면 오늘날의 저나 고영테크놀로지는 없었을지도 몰라요. 2002년 창업 이후 큰 시행착오는 없었어요. 검사장비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제일 잘 팔리는 제품도 만들었고요. 얼마 전부터 새로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메티컬 로봇 분야입니다. 2011년 시작한 이 사업은 제가 직접 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신사업 준비한다고 주력사업 약하게 만드는 것은 바보 짓입니다. 시작할 때는 잘 몰랐는데 2년 정도 하다 보니 이 사업에 어떤 리스크가 있는지 다 눈에 들어와요. 이 사업은 이런 구조로 가고 저 사업은 저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보여요. 수술용 매니퓰레이터는 산업용인데 산업용 로봇 강국인 일본이 왜 그 시장을 열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도 풀렸어요. 직접 부딪쳐보니 수술로봇의 단점은 무엇이고 이것을 극복하려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이제 정리가 다 끝나고 로드맵도 그려졌어요. 지금은 로드맵 대로 차근차근 가는 중입니다. 인튜이티브 서지컬의 다빈치 시스템을 다루는 의사들도 많이 만나서 수술현장의 요구사항들도 알았고요. 그러나 절대 아닌 게 하나 있습니다. 남들하고 비슷하게 접근하는 것은 싫어요. 직원들에게도 그렇게는 못 하게 합니다. 앞으로 다빈치보다 외형이나 성능은 몇 배로 더 강력해진 시스템을 선보일 겁니다. 조만간요.

▲ 고영테크놀로지가 받은 수출의 탑 앞에서 고광일 사장. 지난해에는 칠천만불 수출의 탑을 받았다.

요즘 탐독하는 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읽을 때는 몰랐는데 다시 읽으니 감흥이 오는 책이 한 권 있어요. 미국의 경영컨설턴트 짐 콜린스가 2001년 초판을 썼던 ‘Good To Great’입니다. 항상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읽으며 직원들과 함께 토론의 소재로 삼는 책이에요. 한글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지금은 원서로 다시 보고 있어요. 아마 한글판은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라고 번역이 됐을 겁니다. 이 책에 따르면 지금 고영테크놀로지는 좋은(Good) 기업은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위대한(Great) 기업은 못돼요. 저희가 3D 납도포 검사기(SPI) 분야에서 세계 1등을 해봤잖아요. 그런데 직원들은 그걸로 만족해 버려요. 그건 회사가 초기 자본금의 한계 때문에 시작한 거였지, 최종 목표일 수는 없잖아요. 이 책을 읽으면서 저희가 위대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합니다. 그런 고민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직원들과 공동 학습입니다. 요즘엔 30명의 간부급 리더들이 일주일 2~3번씩 아침에 모여 함께 학습하고 토론을 합니다.

리더들이 모여서 어떤 학습을 합니까?
조직변화와 창조, 그리고 혁신이죠. 전문 교육기관에서 수많은 내용을 압축해서 만든 동영상이 교재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 학습의 주제는 ‘혁신조직의 3P란 뭔가?’ ‘Embedded curves’ 미션을 경영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Visual Thinking은 어떻게 할 것인가?’였어요. 토론 후에 결론이 얻어지면 현업에 바로 적용합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성격이 급하거든요. 꽂히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학습의 의미가 없어요. 대개 조직에서 혁신하려면 리더가 그 개념을 학습한 다음 지시를 하는 과정을 거쳐요. 그러면 그 직원은 다시 리더가 했던 학습을 반복 해야 하는데 그러면 늦어요. 주제를 정해놓고 함께 공부한 다음 함께 결론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제일 좋아요. 단계가 줄어들잖아요. 저희는 30명의 리더가 같이 학습을 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걸려요. 제가 은퇴한 후에 변화라고요? 제 성격에 그런 걸 못 참습니다. 결정했다면 언틸 에스터데이(until yesterday)입니다. 어제까지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일을 시작할 수 있잖아요.

고영테크놀로지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요?
저희는 회사의 비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비전은 조직의 숭고한 뜻이니까요. 처음에는 대한민국에서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보는 게 꿈이었는데, 이젠 그것을 이루었잖아요. 마음 먹으면 언제든지 세계1등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조직도 갖추었고요. 그런데 그게 최종 목표는 아니잖아요. 미국의 인텔과 함께 일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인텔에서는 매년 협력사(supplier)들을 모아놓고 1년 계획이 이렇다, 로드맵이 이렇다 하면서 공유해

▲ 고광일 사장의 꿈은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사진 제공 헤럴드경제>

요.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올해 매출은 몇 %성장하고, 이익은 몇 %로 올린다는 이야기는 없어요. 인류에게는 환경이나 에너지와 같은 문제들이 있는데, 인텔에서는 인류에 공헌하기 위해 에너지를 몇 % 절감하고 환경문제를 풀기 위해 어떤 분야를 담당하겠다는 식입니다. 그 실천 계획 속에서 모바일과 웨어러블PC 솔루션이 나오고 펜티엄칩이 나오는 거에요. 제가 보기에는 그게 바로 위대한 기업의 모습입니다. 저희가 좋은 기업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매출액을 1.5배로 늘리는 계획을 세우면 영업부 몰아치고 협력사들 조여야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는 위대한 기업이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앞으로 일류 복지 향상에 공헌해 보자, 그렇게 되면 위대한 기업의 실천 목표는 홍익인간이 됩니다. 홍익인간을 슬로건으로 내세운다면 할 일은 어마어마해져요. 5000년 전에 단군할아버지께서 벌써 이런 개념을 가졌었다는 게 놀라워요. 이제 사업계획은 홍익인간을 단계별로 실천하기 위해 뭘 해야 할건지가 돼야 하겠지요. 그러다 보면 돈이 벌어지는 거죠. 홍익인간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주주들에게도 이익이 가고, 직원들 많이 채용해서 사회에 기여하고, 인프라가 되는 기술력을 크게 혁신하는 그런 기업을 만드는게 꿈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기업 문화로 자연스럽게 정착돼서 1년에 하나쯤은 혁신적인 제품이 뚝뚝 떨어지게 되는 날 저는 기쁘게 은퇴할 것입니다. ▒ 서현진 기자

고광일 사장 주요 이력
1957년 청주 출생
1980년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1983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제어계측공학과 (석사)
1989년 피츠버그대학교 대학원 (로봇공학박사)
1981년 한국전기통신기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연구원
1983년 금성사 중앙연구소 연구원
1989년 금성산전(현 LS산전) 산업기계연구실장
1997년 미래산업 SMT사업본부 본부장(상무)~연구소장(전무)
2000년 지식경영대상 개인부문 최고 CKO상(한국능률협회)
2002년 고영테크놀로지 창업 대표이사(현)
2010년 벤처기업협회 부회장
2012년 최우수기업가상(언스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