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

전통과학은 현실주의적 인식론 또는 실증주의적 과학관으로서, 관찰대상이 외부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직선적인 인과의 논리에 따르며, 관찰대상의 개념/언어는 거울처럼 실재적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접근은 시스템적 사고를 지향한다. 이 관점에서 관찰대상은 관찰과정에서 나타나는 임시적인 구성물일 뿐이다. 이러한 변화는 최근의 과학적 발견인 자기재생산, 카오스, 시너지, 창발 등 자기조직화 개념을 통해 더욱더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존재론 자체도 구조지향적 존재론에서 과정지향적 존재론으로 바뀌고 있다. 독립적 개체중심에서 상호작용적 관계중심으로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존재/인식론에 관한 철학적 문제는 “누가 관찰자냐?”로 귀결되는데, 현대과학에서는 관찰자란 단지 관찰하려는 의도들의 생산물로 본다. 즉 의도가 관찰자를 만든다고 본 것이다. 결국 자아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의존적인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전월호(2014년 8월)에 소개된 원고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5>에서처럼 관찰자(B)는 대상(A)와의 관찰/행위의 상호작정에서 자신이 관계하는 맥락을 스스로 구성하여 (의도/조작) 인식한다. 이때 우리가 존재에 대해 말하자마자 (또는 생각하자마자) 존재는 이미 상징적 단위들(언어/이론/모델)로 (B’) 대체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조작 없는 참된 인식을 얻을 수 있을까? 경험론적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은 ‘우리는 모른다. 추정할 뿐이다.’고 말한다. 지식은 그저 안다고 믿는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뭔가 알았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그것은 고작 언어/상징/개념으로 표현된 관습으로서의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이 인식하는 것은 자연에 내재된 객관적 모습이 아니라, 과학적 조작에 의해 생산된 것에 불과하다. 즉 과학이 말하는 실세계란 존재론적인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인지적 세계에 불과한 것이다. 즉 과학의 이론과 모델들은 항상 조작적으로 생산된 관찰공간 안에서의 변수들로서 관찰될 수 있고 추정될 수 있을 뿐이다. 실세계는 관찰자의 시각 속에 존재하며, 관찰자의 인지적 조작을 통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찰자의 시각이란 ‘내부적 외형세계모델’(엔도모픽 모델)을 말한다. (엔도모피즘을 기억하는 독자가 계실지 모르겠다.) <그림10>에 나타난 바, 현대 인식론적 과학은 직선적이며 통일된 모습을 갖는 전통과학과는 달리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접근이 허용된다. 입장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접근의 주요 특성은 다음과 같다.

▲ [그림10] 현대 인식론적 과학

(1) 자기준거적 인식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사실들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과학적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존재 혹은 개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현대의 인식론에서는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과학적 개념 또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과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물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적 개념이란 일련의 현상에서 추출한 공통된 준거 속성을 추상적으로 일반화한 개념이다. 따라서 과학적 개념은 경험한 것에 대한 추상적인 구성물일 뿐 물체, 성질, 현상, 사건 등의 본질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2) 진리개념 포기
현대의 인식론에서는 과학의 법칙도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의 개념체라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과학적 법칙은 결코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기에, 체계가 복잡해질수록 더 많은 다양성이 존재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과학적 이론을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과학적 이론이 많은 증거들로 뒷받침되고 있을 경우, 이러한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 전통적 인식론에서는 과학적 이론의 토대가 객관적 사실과 법칙이므로, 과학적 이론도 객관적인 실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인식론의 관점에서 과학적 이론은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된 추상적인 설명 체계일 뿐이며 객관적인 진리가 아닌 것이다.

불확정성이론으로 유명한 양자역학자이자 철학자인 하이젠베르크는 자연세계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탐구에 대해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탐구 방법에 노출된 자연이다”라고 말한다. 현대 인식론의 입장에 따르면, 관찰에 기초한 과학은 결코 객관적이지도 불변의 진리도 아니다. 우리의 관찰은 자연에 이미 존재하는 실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할 것이라고 여기는 가상의 허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3) 시스템적 순환 속에 구성/재구성/해체만이 관찰 가능
우리들이 실질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달리 말해 구성되었다 해체되고 다시 구성되는 일련의 생멸현상의 끊임없는 흐름만이 파악될 수 있다고 한다. 거기에 어떠한 주체적 독립적 주재자도 관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관념의 한계성

“너 이름이 뭐니?”, “몇 살인데?”, “어디 사니?”, “학교는 어디야?”, “고향은?” ...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습관적으로 이름부터 물어보게 된다. 그리곤 추가적인 정보들을 캐낸 뒤, 서로의 관계성을 찾아낸다. 남이 아니니 친하게 지내자는 뜻이다.

“어! 나도 그 쪽에 사는데!”, “우리 형도 거기 나왔어!”, “나랑 띠 동갑이네!” ...

어쩌면 우리는 오직 이름을 비롯한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존재일지 모른다. 인터넷만 뒤지면 다나오는 유명인사의 프로필처럼 정보 자체가 마치 실체인양, 어느새 우리의 전부가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꿩은 ‘꿕꿕’, 뻐꾸기는 ‘뻐꾹’, 까치는 ‘깍깍’, ... 새들은 저마다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고 누군가는 시적인 낭만을 읊조리지만,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오직 언어/논리/관념으로 굳어져 마치 박제된 듯한 새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눈앞에서 예쁜 새가 날아가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볼 생각은 안하고, 그저 머릿속 기억의 한편을 끄집어내어 저 새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기어코 알아내려 끙끙대는 것이다.

“이름이란 뭘까? 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해도 달콤한 향기엔 변화가 없을 것을. 로미오도 이름이 로미오가 아니더라도 이름과는 상관없이 사랑스런 완벽함을 간직할거야. 로미오, 그대의 이름을 버려요. 당신의 일부가 아닌 그 이름 대신 내 모든 것을 받으세요.”

문호 섹스피어의 대표작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름과 관념에 갇힌 로미오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로미오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온전한 사랑을 원하는 것이다.
물론 언어/관념적 표현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언어/개념/논리는 실재를 온전히 드러내기에는 부적합한 도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과 객관의 분별 그리고 상호작용을 통해 세상을 장식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김춘수시인의 <꽃>을 음미해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개념의 세계로부터의 깨어남

현대에 이르러 수많은 철학자, 과학자들이 언어/개념/논리 세계의 한계성을 벗어나 세상을 바르게 보고자 열망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니 구조주의적 과학혁명이니 시스템적 사고니 하며 언어/개념/논리에 갇힌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일고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대목은 이러한 변화를 대표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삭스다.”

독일 철학자 융은 ‘아프락삭스’를 삶과 죽음, 저주와 축복, 참과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 등 대립적인 개념을 포괄하는 초월적 신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모든 이분법적 언어/개념/논리를 벗어난 궁극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 [그림11] 패러다임 전환: 혼신의 노력으로 알을 깨고 나와야 비로소 참된 세상을 볼 수 있다.

아뜨만 과학: 진아

언어/논리/개념의 한계성을 벗어난 궁극의 세계, 즉 해탈의 세계를 진리체계로 파악하는 과학적 사고가 오래전부터 있었으니, 고대로부터 전래되어 온 인도 베단타철학의 아뜨만사상이다. 일상적 언어/개념/논리의 세계는 마치 환영과 같으며, 이것을 벗어나면 궁극적 본질인 영원불멸의 실재, 즉 브라흐만(진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브라흐만은 영원하며, 청정하며, 깨달아 해탈해 있고, 일체를 알며, 모든 힘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브라흐만 외에는 어떤 것도 비실재이며 무명에 의해 그릇되게 상정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깊은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마침내 궁극의 실재인 브라흐만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설령 최고의 경지인 해탈을 얻어 브라흐만과 합일되었다하더라도, 우주의 질서를 지배할 수는 없다. 그것은 여전히 나의 자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꿈을 깬 듯하지만 또 다른 꿈속의 잠꼬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여전히 언어/개념/논리의 덫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림12> 참조) 붓다도 처음에는 아뜨만 과학을 받아들여 직접 수행함으로써 최고의 경지까지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의 진리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아뜨만 과학을 부정하는 것은 붓다 과학의 기본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몇몇 명상가들이나 불교학자들은 은근슬쩍 진아의 개념을 불교로 끌어들인다. 어떤 형태로든 자아가 존재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무명을 벗어나기란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철저히 무아의 진리를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어쩌다 초월적 상태에서 몸이 사라진 깊은 지복의 상태를 맛보게 되면, 그 자체가 진짜 무아의 상태인 것으로 확신해 버린다. 그리고는 불교를 완전히 이해한 것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깨달은 것으로 치부한다. 니체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나 명상가들이 안타깝게도 이 부류에 속해 보인다. ▒ 지승도ㆍ항공대 항공전자 및 정보통신공학부 교수

▲ [그림12] 아뜨만(진아) 과학

* 본 기사는 '월간로봇' 9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표기는 '월간로봇'의 규정에 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