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
니체가 선언하자, 신이 곧바로 대꾸한다. “니체, 너도 죽었어!” 이윽고 낙서를 지우던 화장실 청소아줌마가 한마디 한다. “니들 둘 다 죽는다!”

누가 죽어야 할까? 누가 옳은가? 어떤 존재가 더 진리에 가까운가? 이 글의 마무리에 소개된 ‘팔불중도’와 함께 깊이 사유해보기 바란다.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냐 하겠지만, 이번 호에서는 인류가 걸어온 진리탐구의 여정에 대해 말하고 싶다. 우리 인류는 끝없이 진리를 탐구해오며, 문명을 발전시키고, 더불어 정신적 성장을 거듭하여 왔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되새겨보면서 현실을 직시한다면,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즉 보다 진리에 부합된 뭔가를 만들 수 있으리라.

▲ 인간에게 불을 건넨 댓가로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 제1의 물결인 농업혁명의 주역. 그림은 구스타브 모로의 1800년대 작품(출처: 구글)

그리스신화에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금기된 불을 훔쳐 인간에게 넘겨줌으로써 인간의 문명을 촉발시킨 프로메테우스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것을 계기로 제우스신의 노여움을 사 외딴 바닷가 암벽에 결박되어 독수리에게 끊임없이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희망의 등불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란 이름의 뜻은 ‘사전에 생각하는 자’라고 한다.

우리는 지난번 모델링이라는 개념과 함께 시뮬레이션에 대해서도 살펴본 바 있다. 머릿속의 지식(모델)을 바탕으로 사전에 다양한 실험(생각)을 하는 것이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란 시뮬레이션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비록 신화속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는 인간의 깊은 통찰이 불과 씨앗을 통해 농경문화를 이룩함으로써 문명이 시작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담이지만 미래를 생각하는 자, 문명을 이끈 자의 말로가 왜 하필 고통일까? 무엇을 함축하는 것일까? 깊은 사유가 필요해 보인다.

아무튼 이러한 농경문화의 정착을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변혁으로 파악하여 제1의 물결로 명명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최초의 문명은 그리스를 비롯한 동서양의 현자들, 즉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예수, 붓다, 노자, 공자 등에 의해 철학적, 학문적, 종교적 틀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두터웠던 중세의 신앙적 장막이 걷혀 과학적 발전의 획기적 전기를 맞이한 제2의 물결이 시작되기까지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17세기 산업혁명은 시작됐고 그 중심에는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아이작 뉴턴이 있었다.

▲ 아이작 뉴턴. 과학의 아버지. 제2의 물결인 산업혁명의 주역.

뉴턴은 아인슈타인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침내 물체 간에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통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정리했다. 이를 통해 미적분 등 새로운 수학 법칙도 제시했다. 중세 신앙의 어둠속에 숨겨져 있었던 자연의 법칙들이 그를 통해 하나씩 드러났으며, 이를 통해 산업혁명이 촉발되어 오늘날 과학적 철학적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즉 그가 동역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본 이때부터 본격적인 문명의 발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현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릴만한 이유이다.

컴퓨터의 아번지 폰 노이만

그와 더불어 전개된 제2의 물결은 기관차, 자동차, 비행기 등등 인류문명에 혁신적인 변화를 안겨 주었다. 믿음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 기계의 시대로 전환된 이때부터 변화는 가속화되었다. 마침내 20세기 초 컴퓨터의 개발과 함께 정보의 시대, 즉 제3의 물결이 밀려오게 된다. 아인슈타인과 쌍벽을 이뤘던 인류 최고의 천재 폰 노이만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필자는 아톰과 로봇태권V 세대다. 남자 주인공 똘이나 철이 보다 로봇을 만든 강박사나 김박사가 되어 악당을 물리치고 지구를 구할 로봇을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은 그 당시 또래 아이들의 로망이었다. 그런데 우리들 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지구는 물론 우주 전체를 지배할 로봇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꿈을 세우고 이를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간 아이가 있었다. 그의 계획은 이러했다. 먼저 자기 복제 기능을 갖는 로봇을 만들어 별나라에 보내면, 그 로봇이 그곳에서 자기와 동일한 로봇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구하고 공장을 세워 복제 로봇을 생산해 낸다. 마지막으로 내장된 프로그램을 복사시켜 로봇을 완성한 뒤, 다른 별들로 올려 보내, 동일한 일을 수행하도록 하여, 마침내 우주 전체를 로봇의 지배하에 둔다는 것이다. 황당한 꿈을 꾸었던 그 소년은 자라서 결국 자기복제 시스템을 설계했고, 이를 위해 먼저 컴퓨터를 구현해 냈다. 그가 바로 컴퓨터의 아버지 폰 노이만이다.

▲ 폰 노이만. 아인슈타인을 능가하는 역사상 최고의 천재 과학자. 제3의 물결인 정보혁명의 주역.

니체가 죽은 지 3년 뒤에 태어난 그는 생물처럼 새끼를 낳는 기계, 즉 자기증식하는 기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처음으로 해답을 내 놓았다. 생물학의 수학적 해석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세포자동자(cellular automata) 이론을 통해 인공생명체와 복제의 가능성을 연구함으로써 생물학, 인공지능, 로봇공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머리가 너무 좋아 화성인 또는 악마의 두뇌라고까지 불리었던 그가 구상했던 수많은 아이디어들은 오늘날 각각 학문분야로까지 발전되고 있다. 게임이론, 사이버네틱스, 자기복제시스템, 컴퓨터구조, 시뮬레이션, 생명체 시스템 등이 모두 그가 창조해 낸 개념들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적 과학적 공학적 시각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향식(Top-down)과 상향식(Bottom-up). 하향식 접근이란 말 그대로 위로부터 전체 시스템을 바라보면서 목적한 바에 따라 기능별로 또는 구성체별로 세분화시키면서 세상을 파악하고 설계하면서 만들어나가는 방식을 말한다. 예를 들면 세상을 작은 부품들의 결합으로 파악하려는 방식이다. 제2의 물결과 제3의 물결인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의 기본적 패러다임은 하향식에 해당된다. 즉 기관차, 자동차, 배, 비행기, TV, 컴퓨터 등에 이르기까지 기계 및 전자제품들은 모두 생명체적 개념과는 거리가 먼 기능 중심의 하향식 방법에 의한 것이다.

한편 하향식 접근이 갖는 고정된 기계적 한계점, 즉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환경의 변화에 수시로 적응하는 등 생명력을 갖는 유기체적 생동감의 결핍 현상이 상향식 접근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상향식 접근이란 단순한 행동을 보이는 개체적 유기체 시스템이 집단적으로 상호작용함으로써 전체적인 모습 (또는 목적)이 드러나는, 즉 창발적인 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획기적인 개념, 즉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적 기계를 꿈 꾼 이가 바로 폰 노이만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 즉 컴퓨터는 비록 하향식접근에 의한 것이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기계는 생명체적 기계였던 것이다. 결국 그의 꿈은 그가 아닌 그의 실질적 수제자인 홀랜드에 의해 하나씩 실현되기 시작한다.

참고로 하향식 및 상향식의 대립적 개념을 조금 확장해 보면 객관과 주관, 존재론과 인식론, 질서와 무질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골드문트와 나르시스, 기계론과 유기체론 등의 대립관계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 존 홀랜드. 폰 노이만의 1세대 제자. 컴퓨터과학 최초 박사. 현 미시간대 컴퓨터공학과 및 심리학과 교수. Bottom-up AI의 개척자.

아무튼 홀랜드는 폰 노이만이 꿈 꿨던 수많은 아이디어를 물려받은 실질적 1세대 제자이다. 폰 노이만의 생명체적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과학 1호 박사학위를 수여받는다. 물론 폰 노이만을 모셔오고 연구비를 유치하여 홀랜드와 연결시키는 등 산파역할을 한 미시간대학의 아더 벅스 교수의 노력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홀랜드교수는 명실 공히 폰 노이만의 후계자로서 생명체적 시스템 학파의 창시자가 (일명 미시간 학파 또는 Bottom-up(상향식) AI 분야) 된다. 이를 기화로 복잡적응 시스템(CAS: Complex Adaptive System), 유전 알고리즘, 인공생명, 진화프로그래밍 등 수많은 연구들이 활발히 전개된다. 그를 정점으로 하는 Bottom-up AI 학파의 박사 가계도를 보면, (필자도 포함되어 있지만, 실제로 박사급 족보가 그의 70회 생신을 기념하여 발간된 바 있다.) 3-4세대에 걸쳐 전 세계에 수 백 여명의 저명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컴퓨터시뮬레이션 창시자 지글러교수는 물론, 인공생명을 창설한 산타페연구소의 크리스 랭턴, 유전알고리즘의 개척자인 미시간대학의 골드버그, 유전프로그래밍의 대가인 스탠포드대학의 코자 등등 현존하는 생명체적 지능시스템분야의 대가들이 모두 폰 노이만 할아버지 그리고 홀랜드 아버지 가문의 후손인 것이다.

▲ 버나드 지글러. 폰 노이만의 2세대 제자. 현 아리조나 대학 및 조지메이슨 대학 교수. 컴퓨터 시뮬레이션 개척자. 제4의 혁명인 시간의 무한정성에 기여.

홀랜드의 제자, 즉 폰 노이만의 2세대 제자인 지글러교수는 폰 노이만이 연구했던 세포자동자 이론을 토대로 폰 노이만이 제창했던 컴퓨터 시뮬레이션 이론을 완성하였다. 무덤 속에 있을 폰 노이만이 손자뻘 학자의 연구 결과에 꽤나 흐뭇하여 했을 것이다. 이른 살이 훌쩍 넘은 지글러는 현재도 아리조나대학 및 조지메이슨대학 교수로 왕성한 연구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참고로 뉴턴부터 폰 노이만, 홀랜드 그리고 지글러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걸쳐 태어난 국가는 달라도 모두가 유태인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 지승도: 폰 노이만의 3세대 제자. 현 한국항공대학교 교수. 기호적 시뮬레이션 개척자. 자율적 지능시스템 및 인공마음 시스템 연구자.

유태인이 아닌 순수 토종 한국인인 필자는 지글러교수의 제자로서, 폰 노이만의 3세대 제자에 해당된다. 필자는 지글러교수의 시뮬레이션 이론과 홀랜드교수의 창발적 이론을 통합한 다양한 지능시스템에 관한 연구들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본고를 통해 여러 가지로 강조해온 이성과 감성을 포함하는 마음을 갖는 지능시스템의 설계를 위해 불교인식론과의 통합연구를 진행 중에 있다. 다음호에는 필자가 연구 중인 인공마음 시스템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무덤속의 폰 노이만이나 연로하신 홀랜드할아버지 그리고 지글러아빠가 불교인식론을 도입한 필자의 연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그러나 지난 호에 언급한 바, 철학적 과학적 발전 과정들을 살펴보건대, 이성과 감성 그리고 그 너머의 지혜를 포괄하는 마음에 대한 연구는 필연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관련하여 향후 전개될 지능시스템의 발전 추세를 가늠해 보기 위해, 미래학자 토플러와 더불어 초인적 철학자 니체를 비롯한 불교 수행적 관점에서의 문명 및 정신 발전 단계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인류의 혁명적 발전사

먼저 토플러가 밝힌 인류의 혁명적 발전사를 따라 다시한번 요약해 보자. 먼저 제1의 물결은 불과 씨앗의 활용을 통해 시작된 농경시대의 정착이다. 제2의 물결은 뉴턴을 기화로, 신앙적 중세 암흑시대의 종말과 함께 시작된 산업혁명의 시대이다. 과학적 공학적 발전의 혁명적 전환기이다. 제3의 물결은 폰 노이만의 컴퓨터를 필두로 시작된 정보혁명의 시대이다. 이미 우리는 거센 물결의 한복판을 지나 끝자락에 서있는 느낌이다. 최근 토플러는 제4의 물결이라 할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예견하고 있다. 그는 무한정성(無限定性)에 관한 혁명적 변화를 예고하며, 이를 통해 자본 즉 부의 미래를 말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무한정성의 시대란 상향식 즉 유기체적 접근의 도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무한정성이란 시간, 공간, 지식 등 세 가지 심층기반의 변화를 일컫는다. 즉 제3의 물결에서 하향식으로 세워졌던 지식정보들은 시공간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지난번 시스템이론에서 이미 언급한 바, 모든 것이 변해간다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공간적 변화를 감지하고 대응하는 기술이 미래의 부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요즘 각광받는 빅데이터 개념이 바로 그 기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즉 넘쳐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지식들, 즉 시공간적 변화추세를 따르지 못하는 쓰레기 지식, 일명 압솔로지(Absoledge: absolete + knowledge)에 대한 해결책중 하나일 것이다. 제3의 물결에서 제4의 물결로 넘어가는 핵심 개념이 바로 한정성(하향식)에서 무한정성(상향식)이라고 내다 본 토플러의 통찰이 예리해 보인다.

토플러의 단계별 분류와 맞물려 컴퓨터 및 IT분야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정보의 추상화 수준은 데이터, 정보, 지식, 지혜 등 네 단계로 분류된다. 아래의 그림에서 점으로 나타난 데이터들이 모이면 정보가 된다. 예를 들어 ‘개구리’라는 데이터와 ‘운다’라는 데이터가 연결되면 ‘개구리가 운다’라는 정보가 된다. 만약 ‘개구리가 운다’라는 정보와 ‘비가 온다’라는 또 다른 정보가 결합되면, ‘만약 개구리가 운다면, 비가 올 것이다’라는 하나의 지식이 생성될 수 있다. 이러한 지식들의 결합을 통해 보다 높은 차원의 지식, 예를 들면 ‘습도가 높아지면, 양서류의 움직임이 활발해 진다.’ 등의 상위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나아가 궁극적 지식, 즉 ‘모든 것은 변한다. 변화의 원인이 있음으로 변화의 결과가 있다.’는 등의 지혜의 단계까지도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 정보 스펙트럼: 데이터가 연결되어 정보(information)가 되고, 정보가 결합되어 지식(knowledge)이 되며, 지식으로부터 지혜(wisdom)가 추출된다.

본격적인 과학의 시대가 열린 제2의 물결로부터 수많은 데이터가 생성되었고 이들은 과학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제3의 물결, 즉 정보혁명의 시대에는 데이터와 데이터가 연결됨으로써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정보가 곧 권력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제4의 물결이 시나브로 우리 곁을 찾아오고 있다. 대량으로 쏟아내는 단순한 정보들은 이제 가치가 없어졌다. 지식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모습, 아마도 제5의 물결이 밀어 닥칠 시기에는 틀림없이 지혜의 시대가 열리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는 바이다.

▲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니체는 인간의 정신 성장 과정을 낙타와 사자 그리고 아이에 비유했다.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은 이 그림은 Werner Horvath의 2005년도 작품이다. (출처: 구글)

이번에는 독일의 천재 철학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제시한 인간 정신의 성숙 단계의 세 가지 비유를 통해 토플러의 문명발전의 단계들과 비교해 보자. 그는 인간의 정신이 낙타, 사자 그리고 아이의 순서대로 성숙해 왔다고 여겼다. 먼저 낙타는 의무, 금욕, 도덕 등 억압적 그리고 맹목적 순종을 의미한다. 니체의 말에 따르자면 우리들이 신을 죽이기 전까지, 즉 중세까지의 신앙적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 정신의 모습을 순종적인 낙타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제2의 물결 이전의 상태를 낙타의 단계로 보는 것이다. 다음 비유는 사자로서 저항과 부정, 용맹, 힘, 자유, 고독 등을 상징하는데, 산업혁명부터 정보혁명에 이르는 오늘날까지 불어 닥치고 있는 과학문명의 거센 소용돌이를 의미하는 듯하다. 즉 제2의 물결과 제3의 물결까지의 폭발적 변혁을 니체는 밀림의 폭군 사자로 비유한 듯하다. 니체는 이러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게 되면 보다 성숙된 정신적 단계인 아이의 상태로 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즉 천진난만하고 거룩한 긍정의 힘, 자신의 세계를 찾아 새로운 창조를 해내는 능력을 갖는 궁극적인 초인의 단계를 아이로 비유한 것이다. 제4의 물결에 해당되는 무한정성에 눈을 뜬 인류의 정신세계를 니체는 아이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제3의 물결이 시작되기 이전에 살았던 19세기 철학자 니체는 어느 날 스위스의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순수한 자각 상태, 즉 자아는 사라지고 모두가 하나된 정신적 고양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그 후 그는 그러한 정신적 상태를 우리들 모두가 지향해야할 궁극적 단계로 보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를 유럽의 붓다라고 여겼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토플러의 문명발전 단계와 니체의 정신적 성숙 단계는 상당부분이 일맥상통해 보인다.

그러나 필자의 소견으로 니체는 무늬만 불교인 듯하다. 그가 궁극의 경지로 삼은 아이의 단계는 붓다 이전에도 궁극적 진리로 여겼던 아뜨만(진아)으로 보인다. 즉 그는 자신이 체험한 삼매의 경지를 (순수하고 고양된 정신상태) 궁극으로 착각한 것이다. 평생을 병마의 고통에 시달려왔던 니체로서는 그러한 고통마저 극복하는 초월적 상태를 당연히 최고의 가치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작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고 한 자신의 말을 잊은 듯하다. 삼매 또한 하나의 특정한 마음 상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그것은 궁극의 경지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는 궁극의 경지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깨달은 이라면 누구나 그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모두 착각임을 밝혀냈을 뿐이다. 따라서 아뜨만(진아)이 아닌 아나뜨만(무아)을 설했던 것이다. 어쨌든, 필자의 소견으로 니체의 아이 단계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어른(?)의 단계까지 이르러야 궁극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불교 수행적 관점에서의 발전 단계를 살펴보자. 불가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 중에 진리탐구의 과정을 소 길들이기에 비유한 심우도(또는 십우도)가 있다. 전국 사찰 어느 곳에서나 대웅전 벽화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과학적 발견 및 발전 단계를 다시한번 짚어보자.

▲ ① 심우: 잃어버린 소를 찾기로 결심하다

①심우(尋牛)단계는 아이가 잃어버린 소(진리)를 찾아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서는 단계이다. 생각하고 머리 쓰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알기를 원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강조하지 않는가! 세상의 참모습을 알려는 의지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도 다르지 않을 듯하다. 시작이 반이라고도 한다. 일단 동기가 세워졌으면 하루빨리 결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 ② 견족: 소의 발자취를 보다

②견족(見足)단계는 소의 발자취를 발견하는 단계이다. 이제 진리를 탐구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아마 불과 씨앗을 활용하면서 정착된 농경문화를 이루게 된 제1의 물결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때부터 철학적 종교적 학문적 사유체계가 하나씩 갖춰져 간다. 니체의 관점으로 보면 인간 정신 발달의 첫 단계인 신에 대한 순종을 통한 문명발전의 시작을 알리는 단계, 즉 낙타의 단계라 할 것이다.

▲ ③ 견우: 드디어 소를 보다

③견우(見牛)단계는 발자취를 쫓던 끝에 소를 직접 목격하는 단계이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직접 목격하였듯... 따라서 산업혁명을 통해 본격적인 과학문명의 시대를 시작하는 제2의 물결이 시작되는 단계로 보인다. 니체가 제시한 정신 발달 과정의 비유에서 보면 사자의 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과거 낙타시절의 맹목적인 순종을 벗어나 과학적 진리를 근거로 스스로에 의지하는 단계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 ④ 득우: 마침내 소를 잡다

④득우(得牛)단계는 마침내 소를 붙잡아 고삐를 물리는 단계이다. 이제 진리를 손에 움켜 쥔 만큼, 미래가 기대되는 단계이다. 기관차, 기관선, 자동차, 비행기, TV 등 수많은 기계문명이 꽃을 피웠다. 비록 소를 붙들어 매기는 했지만 야생에 길들여진 소는 여전히 거칠게 저항한다.

▲ ⑤ 목우: 소를 길들이다

⑤목우(牧牛)단계는 아직 야생성이 강한 소를 온순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조금씩 길들이는 단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소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비교적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즉 정보를 이해하고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 ⑥ 기우귀가: 소를 타고 귀가하다

⑥기우귀가(騎牛歸家)단계는 완전히 길들여진 소를 타고 자유자재하게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 단계이다. 과학적 진리를 비교적 자유롭게 다룰 줄 아는 단계로 정보의 보편화 시대가 열린 제3의 물결이 여기쯤 해당된다고 보겠다. 존재론에 입각한 관점으로 만물들의 객관적이고 정형화된 모습을 토대로 목적한 바, 세밀한 단계까지 하향식으로 시스템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과학적 역량이 성숙된 단계이다. 그러나 여전히 지혜에는 어두운 원초적인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상태이다.

▲ ⑦ 망우존인: 소는 없고 사람만 있다

⑦망우존인(忘牛存人)단계는 소는 없고 소치는 사람만 남아 있는 단계이다. 즉 대상(객관세계)은 없고 바라보는 주체(주관)만 있는 단계이다. 존재론적/객관적 시각에서 인식론적/주관적 시각으로의 변화가 진행되는 단계이다. 니체의 정신 발달 단계로 보면 여기까지가 마지막 단계인 아이로서의 단계, 즉 니체가 궁극적으로 여겼던 초인적 단계가 아닐까 판단된다. 실제 심우도에서도 여기까지만 아이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즉 이 이후의 단계, 즉 어른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空의 단계와 空色如如의 단계까지 니체는 파악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래서 정신 발달 과정을 아이까지만 그렸는지 모른다.

▲ ⑧ 인우구망: 소와 사람 모두 없다

⑧인우구망(人牛俱忘)단계는 소도 없고 소치는 사람도 없는 空의 단계이다. 객관과 주관 모두가 실체적이지 않은 본질적 세계를 파악하는 단계이다. 토플러의 입장에서는 무한정성이 강조되는 제4의 물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실체적이라기보다는 인과적 관계성에 의한 시공간적 움직임, 즉 상향식 관점에서의 진리를 얻는 단계인 것이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더 이상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닌 것이다.

▲ ⑨ 반본환원: 있는 그대로이다

⑨반본환원(反本還源)단계에서는 보이는 진리와 보이지 않는 진리, 즉 존재론과 인식론, 하향식과 상향식, 색과 공, 질서와 무질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등 양립하는 상대적 개념들이 융합되고 조화되어 본래의 참 모습을 찾는 단계이다. 아마 앞으로 다가올 제5의 물결은 이러한 중도의 시대가 되지 않을까? 이 단계쯤은 되어야 우리들은 지식 너머의 지식 즉 지혜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임을 온전히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 ⑩ 입전수수: 세상에 나오다

⑩입전수수(入廛垂手)단계는 터득한 본질적 지혜, 공과 색이 어우러진 지혜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단계이다. 진리가 그리고 과학이 비로소 자연과 더불어 인류를 이익 되게 하는 윈윈의 단계가 될 것이다. 진리가 우리들을 진정 자유롭게 만드는 단계인 것이다. 아이는 어느덧 자라나 어른이 되어, 저잣거리를 어슬렁대며 태평가를 부른다.

우리는 이번 호에서 문명과 과학 그리고 정신의 발전 단계들과 상호 연관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비록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표에 종합적으로 정리한 바, 오늘날 우리들은 제4의 물결이 밀려옴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수많은 변화와 진화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에 오히려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혼동 속에 새로운 창조, 새로운 질서, 즉 궁극의 지혜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듯이...

▲ <표> 인류의 문명 발전 과정, 정신적 성숙과정 그리고 진리탐구의 여정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모자라지도 않는 (中道) 바로 그 길에 지혜시스템으로 가는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지, 불교학자 나가르주나가 쓴 <중론>에 나오는 존재의 실상에 대해 정리한 ‘팔불중도(八不中道)’로 마무리한다.

不生不滅 새롭게 생겨나지도 않고,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으며, (공간의 무한정성)
不斷不常 항상 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시간의 무한정성)
不一不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수량의 무한정성)
不去不來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운동의 무한정성)
▒ 지승도ㆍ항공대 항공전자 및 정보통신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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