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신문'은 '월간로봇'과의 기사 제휴를 통해 앞으로 매주 한편씩 '월간로봇'이 제공하는 기획물을 게재합니다. 이번주에는 '월간로봇'에 절찬리에 연재되고 있는 '지승도 교수의 인공지능 이야기⑤'를 엄선했습니다. 아울러 독자여러분의 편의를 위해 ①~④편을 관련기사로 묶었습니다.
필자인 지승도 교수는 한국항공대학교 항공전자 및 정보통신공학부 소속으로 전공분야는 지능시스템과 시뮬레이션입니다. '지승도 교수의 인공지능 이야기'는 매달 4번째 주 월요일에 업데이트 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애독 바랍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Art is long, life is short!

고대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명언이다. 의사가 예술에도 조예가 깊구나 하는 정도로만 여겼는데, 본래 의미가 잘못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시대에는 'art'란 예술이 아닌 기술(technology) 전반을 뜻했다고 한다. 따라서 히포크라테스가 “수명은 짧은데, 이를 연장시킬 기술(의술)을 얻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 이를 어찌하랴!”하면서 내뱉은 탄식의 말이 오늘날 다른 의미의 명언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사실 예술이 기술과 분리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이 무렵에서야 기계적 (이성적) 기술을 ‘기술’이라 불렀고, 아름다운 (감성적) 기술을 ‘예술’이라 칭하였던 것이다. 사실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르겠는가! 세상을 나름대로의 관점으로 파악한 뒤, 뭔가를 만들려는 의도를 내고, 계획을 세워 구상을 한 다음, 구체화시키는 일련의 과정들은 유사 이래로 모든 작업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다. 단지 대상과 의도만이 다를 뿐...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 했는지 모른다. 뭔가를 파악해야 뭔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예술이건 기술이건 세상에 대한 인식과 통찰 그리고 개념화/추상화를 다루는 모델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역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몇몇 모델러들을 예로보자. 고대 중국의 노자는 무위자연을 통한 도를 궁극의 진리로 파악한 모델러이다. 우주만물 모든 것이 숫자로 표현된다고 주장한 피타고라스는 수학적/기하학적 모델러일 것이다. 모든 형태와 미를 지배하는 통일된 법칙을 수학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 역시 인체를 자연의 일부로서 유기체적 관점으로 모델링한 최초의 모델러였기에 의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불멸의 본질로 이데아를 제시한 플라톤은 존재론적/개념화 모델러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우리들에게 세상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제시해준 모델러임에 틀림없다. 무아/공성을 본질로 파악한 붓다는 인식론적/연기론적 모델러임에 틀림없다. 모두들 이미 2000년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놀랍다. 물론 위대한 모델러가 어디 고대 철학자나 수학자나 종교가뿐이었겠는가? 중세는 물론 근현대사를 통해서도 수많은 모델러들이 다양한 통찰과 추상화 작업을 통해 진리를 밝히고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앞장서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일찌감치 예술과 과학을 융합시켜 미적본질을 탐구했던 미학과학적 모델러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세상을 동역학의 관점으로 재조명한 뉴톤이 현대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기계론적 모델러이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기계론적 관점에 생물론적 관점을 융합한 모델러는 컴퓨터의 아버지라 일컫는 폰 노이만일 것이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쳐났던 그의 머릿속 모델들은 오늘날 지능시스템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고 있다. 그가 품었던 호모모픽 세계가 전개되는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세계 최고의 철학자, 종교가, 수학자, 과학자, 예술가 등의 위인들을 모델러라는 다소 생뚱맞은 용어로 싸잡아 언급하니, 독자들께서는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겠다. 여기서 잠시 교과서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용어 정리가 필요하겠다.

학문적 활동이란 본래 영원불변한 진리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테오리아(theoria)", 즉 관조라 불렀고, 이것이 곧 이론(theory)으로 정착되었다. 여기서 ‘바라보는 것’, ‘관조’, ‘이론’, ‘아는 것’은 동일한 의미이다. 이를 일컬어 우리는 ‘과학’이라 한다. 과학(science)의 어원은 라틴어 scire(알다)로부터 전래된 것이다. 쉬운 말로 ‘알기’가 곧 과학인 것이다. 이를 통해 ‘알아낸 것’이 곧 이론이고, 법칙이고, 원리이고, 지식이고, 표현체이고, 추상체이고, 이미지이고, 달리 말해 모델인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알아낸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기술이고 공학이다. 기술(technology)의 어원은 그리스어 techne(생산함)에서 비롯되었다. 공학(engineering) 또한 라틴어 engeniem(발명 또는 천재가 고안한 것)에서 유래되어, 흔히 ‘직업적인 기술’의 의미로 사용된 바, 기술과 공학을 동의어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아무튼 ‘알기’는 과학이고, ‘만들기’는 공학으로 정리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인류문명의 역사는 한마디로 ‘알기’와 ‘만들기’의 연속이었는지 모른다. 대표적 예로 현대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뉴톤의 경우를 보자. 여러 가지 이견이 있기도 하지만,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관조: theoria) 뉴톤은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자연현상에 대한 동역학적 모델을 세상에 내놓는다. 깊게 관조하고 (theory) 통찰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과학적 (알기: science) 결과를 (모델, 이론, 원칙) 얻은 것이다. 물론 그 결과물들이 오늘날 자동차를 (engineering: 만들기) 만든 밑거름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역사상 위대했던 몇몇 모델러들 그리고 그들이 정립한 모델들

▲ 뉴톤: 떨어지는 사과에서 자동차의 원형질을 발견한 동역학 모델러

‘알기’작업의 결과가 ‘만들기’작업으로 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진 경우가 어디 뉴톤 뿐이겠는가? 붓다는 공성을 안 뒤, 자비를 실천덕목으로 제시하며 마침내 불교라는 종교를 이끌었다. 노자는 도를 안 뒤, 무위자연을 행하라며 도가를 창설했다. 소크라테스를 앞세운 플라톤 역시 이데아를 안 뒤, 최상의 선과 미를 실천하라며 우리들 삶속으로 파고들었다. 히포크라테스가 세운 인체모델은 의학적 방법과 도구로 진화됐다. 피타고라스가 정립한 수학/기학학 모델은 건축을 비롯한 모든 형태학적 분야에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학적 개념은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 불후의 걸작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폰 노이만의 자기복제 모델은 컴퓨터와 인공생명 등 지능시스템으로 구현되고 있다. 이렇게 위대한 모델러들의 ‘알기’는 ‘만들기’를 통해 완성되어 우리들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고 있다. 적어도 그래 보인다.

지능시스템 또한 인간 모델러들의 사유방식이나 행동방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 그 원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먼저 실세계와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살펴보자. 태초부터 인간은 필요성의 충족을 위해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지속해 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호작용의 방식은 보다 다양해지고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어 갔음은 물론이다. 특히, 인간의 논리적/분석적 능력은 실세계와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점점 진화된 형태를 갖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은 주변 환경을 지배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 실세계와 인간(모델러, 지능시스템)간의 상호작용

인간과 실세계간의 상호작용은 정형화된 모델 또는 추상적 표현체를 필요로 한다. 특히 과학적 활동은 정형화 모델링 작업의 대표적인 예이다.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과학자들은 실세계 현상들에 대한 검증된 가설을 정형화시킬 수 있는 추상적 표현체와 법칙을 찾아내려한다. 정형화된 모델은 실세계의 주요 특징을 표현한 것으로서, 실세계를 설명하고, 분석하고, 설계하는 것을 도와준다. 이렇게 모델은 실세계를 지배할 힘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비단 과학적 접근에서뿐만 아니라 학문, 문학, 정치, 경제, 예술은 물론 사교, 연애 등 일상적으로 생각하고 행위하는 모든 삶속에서 늘 벌어지는 일이다.

'내 안에 너 있다’

한 때 유행했던 TV드라마 <파리의 연인>속의 명대사지만, 이 말처럼 지능시스템의 핵심원리를 함축하는 표현은 드물 것이다. 지난 호에서 우리는 호모모피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대상체(실세계)와 모델간의 유사성 관계를 호모모피즘이라 하였다. 만약 대상체에 대한 호모모픽 모델을 내가 갖고 있다면, 대상체와 나와의 관계는 엔도모피즘(endomorphism)이 된다. 다소 난해한 추상대수학의 용어지만 엔도(endo)란 접두어는 내배엽성을 (내 안에 뭔가 있다는 의미) 나타내며 모르피즘(morphism)이란 원형질을 (본질) 뜻한다. 따라서 엔도모피즘이란 내가 대상체에 대한 어떤 원형질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호모모픽 모델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엔도모피즘이 충족된 시스템을 우리는 대상체를 아는 (대상체에 관한 지식이 있는) 지능시스템이라 정의한다. 우리는 ‘알기’가 곧 과학이라고 하였다. 당연히 ‘알기’를 완성한 지능시스템이라면 이를 활용한 ‘만들기’ (공학) 단계로 넘어 갈 것이다. 즉 ‘내 안에 너 있다’가 된 자는 이제 너를 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로소 카사노바가 된 것이다.

▲ 대상체(B)에 대한 모델링 과정

▲ 대상체(B)와 모델(A_B')간의 호모모피즘 관계

▲ 대상체(B)와 인간/지능시스템(A)간의 엔도모피즘 관계

모델링만 잘 하면 누구나 카사노바가 될 법한데, 과연 모델링 작업이란 게 그리 만만한 것일까?

◆ 모델 표현의 어려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시인의 <꽃>(1959)의 한 구절이다. 이름자 하나 붙여준 게 뭐 그리 대단하냐 하겠지만, 사실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너와 나의 구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호모모픽 모델이 생겼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장>하신 것도 세상을 창조해나가는 모델러의 측면에서는 수긍이 간다. 말씀(언어, 이름자)이 곧 최초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델링이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삼라만상은 각각 고유의 존재로서 식별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때부터 우리들의 비극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비록 너(꽃)가 내게 다가와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는 되지 못한다. 아이소모피가 아닌 호모모피에 머물기 때문이다. 즉 실세계와 모델간에 유사성은 갖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뭔가 이것이 진리라고 한정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자조차 없던 시절 그저 너와 나 구별 없는 하나의 몸짓이었을 시절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름자로 인하여 번뇌만 하나 늘어난 셈이다.

노자 또한 이 점을 무척이나 강조한다. 말로 형상화된 이름은 언제나 진실된 실재를 나타내는 이름이 아니라고. 이름이 부여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라고.

명가명 비상명 名可名 非常名 <도덕경 1장>

플라톤 또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국가론> 7장 ‘동굴의 비유’를 보면, 세 종류의 모델이 등장한다. 하나는 우리들 무지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최하위 수준의 모델로서 (가장 왜곡이 심한 모델) 동굴에 비춰진 그림자를 말한다. 또 하나는 약간의 지식을 갖춘 이들이 갖는 중간 수준의 모델로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동굴 속 물체들로 (꼭두각시) 비유하고 있다. 마지막 모델은 최상의 지혜를 갖춘 이들만이 알 수 있는 궁극의 모델로서 동굴 밖 광명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이데아를 말한다. 이처럼 붓다도 노자도 플라톤도 한결같이 말로는 표현불가한 궁극의 모델, 즉 아이소모픽 모델이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궁극의 모델만이 우리에게 유용한 것은 아니다. 플라톤과 견해를 달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다양한 수준의 모델을 통해 우리는 어렴풋이 본질을 느끼고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심지어 흉한 동물들이나 시체처럼 불쾌감을 주는 실세계 대상일지라도 일단 그림 등 추상화된 모델로 바라보면 불쾌감은 커녕 오히려 쾌감을 느끼고 이를 통해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 플라톤의 <국가론> 중 동굴의 비유: 동굴 벽면만을 향하도록 결박되어 있는 죄수들은 옴짝달싹 못한다. 죄수들은 인형술사가 조종하는 꼭두각시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연히 죄수 중 한 명이 결박에서 풀려난다. 온갖 고난 끝에 동굴을 빠져나와 비로소 태양이 비추는 진리의 세계를 보게 된다. 그리고는 결박되어 있는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어두운 동굴로 되돌아간다.

◆ 모델간 그리고 실세계간의 일치성 문제

‘내 안에 너 있다’고 했지만, 어디 너만 있으랴! 나도 있고 모든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림에서처럼 호모모피즘의 세계가 끝없이 펼쳐질 것이다. 내 안의 나(나-나’) 안에는 또 다른 나가 (나-나-나’’)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뿐이랴! 내 안의 너(나-너’) 안에 너 (나-너-너’’)도 있고 또 나도 (나-너-나’’)도 있을 것이다. 실세계와 모델 간에 또는 모델과 모델 간에 호모모피즘이 유지되는 한, 모델들은 추상화 관계 속에서 끝 없이 전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뭔가 다채롭고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들의 고뇌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가수 조성모는 내안에 내가 너무나 많아 고민이라고 <가시나무새>(2000)를 통해 노래한다. 일상의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우리들의 갈등을 한번 살펴보자.

“내가 생각했던 너는, 네가 알고 있는 네가 아니었어!”
(이것은 <나-너’>와 <너-너’> 사이의 불일치로 볼 수 있다.)

“너는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한다고 보니?”
(이것은 <나-너’>와 <너-나-너’’> 사이의 검증 요구로 보인다.)

“난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데, 넌 내가 날 어떻게 생각한다고 보니?”
(이것은 <나-너’>와 <너-나-나’’> 사이의 일치성을 묻는 것으로 해석된다.)

“난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데,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
(이것은 <나-나’>와 <너-나’> 사이의 일치성 여부를 묻는 것으로 보인다.)

“나도 나를 모르겠어!”
(이것은 <나>와 <나-나’> 사이의 불일치를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생각했던 너는 그렇지 않았어!”
(이것은 <너>와 <나-너’> 사이의 불일치를 하소연하는 말로 보인다.)

▲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엔도모픽 세계

이와 같이 모델과 실재 사이의 불일치 그리고 모델과 모델 사이의 불일치 문제는 아마 유사 이래로 항상 존재해 왔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苦라고 하는지 모른다. 너도 내 맘대로 안되고, 심지어 나 조차도 모르겠으니... 물론 지혜로운 모델러라면 이 문제를 직시하고 손수 해결하려 할 것이다. 순전히 苦의 문제를 풀기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델링을 완수하여 마침내 답을 찾아낸 붓다처럼...

◆ 모델과 실세계간의 인식론적 혼란 문제

대형마트에서 실제로 판매중인 상품인 브릴로 박스와 (실세계) 초현실주의 작가 앤디 워홀이 재현해낸 <브릴로 박스>는 (모델) 같으면서도 다르다. 이와 같이 엔도모피즘에서 나타나는 실세계와 모델 사이의 추상화 관계성을 활용한 작품은 인식론적 의미를 담아내는 심오한(?) 초현실주의적 걸작이 되기도 한다. 이 보다 앞선 또 다른 초현실주의 작가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도 작품 속 파이프는 실세계로서의 파이프가 아니라 추상적 이미지 모델로서의 파이프를 나타내고 있다. 친절하게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까지 보인다.

▲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 (1964) (사진좌측).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29) (사진우측)

실세계와 모델간의 인식론적 혼란 문제가 어디 예술작품뿐이겠는가? 일상생활 속에서도 우리들은 흔히 “꿈과 같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또한 실세계(현실)와 모델(가상) 사이에 벌어진 인식상의 혼란 때문일 것이다.

전에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것이 분명 나비였다. 스스로 즐겁고 뜻대로라 장주인 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금 뒤에 문득 깨어보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엔도모픽 세계에서 빚어지는 혼돈의 사태를 장자는 <호접몽>을 통해 잘 보여 주고 있다.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붓다 또한 실세계를 포함한 모든 모델들은 실체가 아닌 임시적인 것으로서 꿈결처럼 여기라고 말한다. 실재라고 여기는 현실이 진실에 있어서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은 비단 붓다뿐이 아닌 노자나 플라톤 등 모든 현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바이다. 마치 동굴 속 벽면위에 비치는 그림자나 또는 꿈속의 일들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명이나 무지로부터 벗어나 근원적 실재, 즉 ‘도’나 ‘공’이나 ‘이데아’를 보라는 것이다. 즉 궁극의 모델을 찾으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구한말 묵암스님의 <꿈>이라는 시를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해 보자.

꿈속에서 꿈 이야기를 하며 남을 꿈꾼다 하며
꿈과 꿈이 끝이 없어 꿈을 깨지 못하나니
비록 나비되어 장원 밖을 날았으나
그래도 그는 분명 꿈꾸는 사람이다.

◆ 모델링에서 얻는 삶의 지혜

우리는 세상을 너무나 모르고 자기 자신조차도 모른다. 그러니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어디 자신뿐이랴! 사랑하는 그님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세상사 어느 하나 속시원히 해결되는 것이 없어 보인다. 갈증을 해소하려 우리는 또 다른 것을 갈망하며 끝없이 뭔가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실세계와 모델간의 격차만 더욱 커질 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하고,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한다. 실세계/모델간의 간격을 좁히라는 것이다. 붓다 또한 모든 존재의 동질성을 선언한다. 본질과 하나 되는 것, 아이소모피즘! 이것이 열반이라고 강조한다.

▲ 현자는 말한다. “너 자신을 알고, 남을 사랑하면, 행복하리!”(A ≡ A_A' ∩ A ≅ B)

▲ 열반이란 너와 나 그리고 자신 안에 대한 모든 차별성이 소멸한 상태이다 (A ≡ A_A' ≡ A_B' ≡ B ≡ B_B' ≡ B_A')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벽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로 유명해진 라이프 잡지의 모토이다. 진정한 모델러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명감에 충실한 주인공 월터는 현실과(실세계) 상상을 (모델) 넘나들며 진실에 한걸음씩 다가간다. 실제 카메라에는 망원렌즈, 줌렌즈, 광각렌즈 등 다양한 도구들이 있어서, 궃이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더라도 당기거나, 밀거나, 펼치거나 하면서 얼마든지 원하는 크기로 담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은 필연적으로 이미지상의 왜곡현상을 수반한다. 진실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모델러라면 피사체의 눈높이로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야만 할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 보자. 동굴 벽면의 그림자만이 진실인 줄 알았던 죄수가 마침내 결박에서 풀려났다고 하자. 그는 먼저 벽면의 그림자를 비추는 빛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결박상태가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것이다. 그러다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동굴 밖으로 빠져나와 강렬한 햇빛을 보게 되면 기쁨도 잠시 더욱 큰 고통을 느낄지 모른다. 비록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한동안 후회가 밀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안정되고 차차 적응이 되면 고통은 눈 녹듯 사라지고, 속박에서 풀려난 해탈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와 같이 궁극의 모델인 이데아를 알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고통이 수반된다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은 얼핏 보면 대부분 현자들의 견해와 유사해 보인다. 6년간의 처절한 고행을 끝낸 뒤, 붓다는 심신을 추스려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마침내 궁극의 진리를 깨닫는다. 마치 동굴에서 빠져나온 죄수의 여정처럼 무척이나 힘든 모델링 과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친절하게 일러준다. 고행할 필요 없다고. 자신의 고행은 잘못된 것이라고. 고행이던 쾌락이던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온전한 마음으로 집중하여 관찰하면 누구라도 궁극의 모델을 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제대로 관찰만 하면 누구라도 스스로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노자, 플라톤, 붓다, 예수 등 수많은 현자들이 궁극의 세계를 설명하려 하지만, 그것은 언어로 한정하는 순간 왜곡되기에 직접 겪어 보기 전에 머리로 헤아려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심지어 그들이 보았다는 궁극의 진리도 동일한 것인지, 그리고 진짜 진리가 맞는지 조차 우리들로서는 사실상 판단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세상을 바르게 아는 일일 것이다. 왜곡현상을 바로잡아 苦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일 것이다. 즉 바른 모델링일 작업일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렵다하더라도... 비록 낮은 수준의 모델로부터 출발한다 하더라도 궁극의 모델을 향해 가야만 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들의 숙명일지 모른다. 바라보는 것이 모델링이라 했다. 잘 관찰하면 알 수 있다 하지 않는가! 이제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내 님에게로. ▒ 지승도ㆍ한국항공대 항공전자 및 정보통신공학부 교수

▲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3): 주인공 월터는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진실 가까이 다가선다.